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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Nov 29. 2020

스쿨버스 2호차의 기억

나의 유년시절

IMF 외환위기로 아빠 회사가 부도나기 몇 년 전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교육에 그리 극성맞은 편은 아니었던 우리 엄마는 그즈음에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가까운 국공립학교들을 놔두고 언덕배기에 있는 사립학교에 나를 보냈다. 커다란 교복 소매를 내 팔에 말아 올려주며 애들은 금세 자라니까, 엄마가 말했다. 같은 반 친구들의 교복도 다 같은 모양새였다. 나는 키도 잘 크지 않고 엄마 말처럼 금세 자라지도 않았지만 두 번 말아 올리던 소매를 한 번만 말아 올릴 때쯤, 우리 가족은 화정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민족정기 회복의 차원으로 국민학교가 드디어 초등학교로 바뀐 해였다.


노란 스쿨버스는 갈현동 매봉산 아래에 있는 선일초등학교를 출발해서 서울과 맞닿은 경기도 신도시를 순회했다. 실제로 30분 거리였지만 우리 집은 2호차 노선의 마지막 부분에 있어서 도착하려면 늘 한 시간이 걸렸다. 나는 학교에서의 시간들보다 버스 위에서의 시간들이 더 많이 기억에 남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할 일이 주어지지 않는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버스 위에서는 선생님의 지도 없이 우리끼리 자유로웠다. 버스기사 아저씨가 있었지만 아주 간혹 가다 위험한 행동을 할 때에만 주의를 주실뿐이었다.


교실에서의 단짝과 버스에서의 단짝은 달랐다. 교실에서의 기쁨은 버스에서의 기쁨과 달랐고, 교실에서의 고민은 버스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집 밖에서 생겨난 그 어떤 감정도 집으로 끌고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오늘만, 지금만 생각하며 열 살짜리에게 맞게 시간은 단순히 흘러갔다. 내가 5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민지라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같은 반이면서 같은 동네에 살아서 같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민지네 집이 가까워오면 그 아이는 '우리 집에서 놀고 갈래?' 자주 물었고 나는 거의 매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의 집에 놀러 가면 늘 내가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이 있었다. 거대한 저택의 2층 바닥과 지붕이 열리며 저택의 내부가 드러나는 장난감이었다. 어른 손가락 한마디 만한 작은 인형들이 그 대저택 안에 살았다. 우리는 함께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고 민지 아버지가 출장을 다녀오시며 사온 일본 만화 비디오를 봤다. 민지는 주로 나에게 무언가를 제안하거나 하라고 시켰고 나는 주로 따르는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에 나는 굉장히 수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남들이 좋다는 것을 주로 따랐다. 한마디로 주관이 아주 흐릿한 인간이었다. 반면에 민지는 주관이 뚜렷했다. 본인이 좋은 건 해야 했고 싫은 건 거부하면서 주변 친구들도 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서 민지는 나랑 잘 어울려 놀았다.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볼록한 장난감이 꼭 맞게 들어가는 블록처럼.


최초의 사건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스쿨버스에서 함께 친하게 지내는 다섯 명 사이에서 한 명이 왕따를 당했다. 주도자는 분명 민지였다. 민지가 한 명을 지목하면 그때부터 그 아이는 왕따였다. 민지가 다음 왕따를 지목할 때까지. 나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은 지시에 따르듯이 그 왕따놀이에 동참했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가 딱히 싫었던 것이 아니어서 통쾌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았다. 민지가 우리 집에서 놀고 갈래? 하고 묻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것처럼 그런 질 나쁜 놀이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참여했을 뿐이었다.


물론 내 차례도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스쿨버스에서의 괴로움을 집으로 들고 들어왔다. 집에 와서 언니랑 맛있는 것은 먹고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보면서도 내일 아침 벌어질 상황을 마음속에 그렸다. 고민의 크기가 커졌던 걸까 아니면 내 머리가 커져서였을까. 그때는 더 이상 오늘만 지금만 생각하는 단순한 유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현이는 내가 왕따 당하는 것에 동조하지 않았다. 같이 비웃지도 않고 같이 욕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느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고마워했어야 하는데. 수현이가 왕따를 당할 때도 똑같이 동조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다수가 하는 행동을 항상 따라 했다. 그것이 좋든 싫든.


5학년이 끝나갈 때쯤에 스쿨버스에서 민지는 우리에게 왕따를 당했다. 우리 모두 너도 한번 당해 봐라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하나도 통쾌하지 않았다. 교실에도 민지는 있었다. 책상에 앉아서 흐느껴 울었고 다른 친구들이 그 아이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 나는 어색하게 앉아서 그 상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6학년에 올라가면서 민지는 어딘가로 전학을 갔고 우리는 서로 편지를 한두 번 주고받다가 아예 연락이 끊겼다. 그 아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야무진 볼살 한쪽에 보조개가 콕 찍힌 그 아이. 내가 어린 시절의 나를 정의할 때마다 민지가 생각이 났다. 멍청하고 어리숙했던 나를 좌지우지했던 스쿨버스 그 아이. 단짝? 우두머리? 대장? 그 아이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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