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진상은 비와 함께 왔지.
우리 편의점의 일상도 농사일만큼이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추운 날씨에는 거리에 사람이 없어서 근근이 오는 손님에게 담배를 팔았다. 날씨가 화창한 6월부터 맥주를 집어가는 손님들이 부쩍 늘고, 찌는 듯이 더운 8월은 편의점의 성수기라 매출이 가장 좋았다. 그때는 얼음컵 음료가 가장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 얼음컵은 발주하는 요일이 정해져 있는데 발주를 한번 놓치면 '죄송합니다 손님ㅠㅠ'하고 몇 개월치 사과를 하루 안에 다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여름 성수기의 숨은 복병, 장마기간에는 우산을 넉넉히 발주해두어야 했다. 태풍이 오면 발주에 신경 쓰는 것뿐만 아니라, 파라솔을 잘 접어 놓거나 외부 진열된 상품들을 전부 점포 안으로 들여다 놓는 일까지,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았다.
물론 편의점을 하며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날씨뿐만이 아니었다. 날씨가 편의점의 매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면 진상 손님은 편순이의 멘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심지어 날씨는 통제할 수 없어도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지만 진상 손님은 그렇지 않다.
그날도 일기예보대로 비가 오는 여름날이었다. 빗줄기가 굵어서 길에 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계산대 뒤에서 담배 재고를 조사하며 손님을 기다렸다. 그때 딸랑이는 문을 열고 덩치 큰 아저씨가 한 명 들어왔다. 비가 많이 오는지 우산을 쓰고서도 어깨가 젖어있었다. 아저씨는 꽤 낯익은 얼굴이었다. 디스플러스 두 갑을 달라는 짜증 섞인 말투를 들으니, 지난번에도 내 신경을 긁었던 손님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슬리퍼에 늘어난 티셔츠 차림을 보아하니 편의점 뒤편에 늘어선 빌라에 사는 주민이겠구나 생각했다.
담배 종류는 왜 그렇게 많은지, 디스플러슨지 마이너슨지 나는 몇 개월을 팔아도 그 이름이 가끔씩 헷갈렸다. 그럴 땐 주로 배시시 웃으며 '제가 잘 몰라서요'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흡연자들은 그 많은 유해상품들 중에 자신의 것을 찰떡같이 찾아서 열심히 손가락질해주었다.
그런데 내가 실수로 디스플러스가 아니라 디스 두 갑을 계산대에 내려놓았을 때, 그 아저씨는 성질을 내며 "아 디스 말고 디스플러스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속으로 '그래, 이 새끼 전에도 담배 사러 와서 성질부렸지. 이윤도 더럽게 안 남는 담배 두 갑 사가면서 감정만 과소비하시네'생각하며 기분이 팍 상했다. 비도 오고 장사도 안되는데 진상까지 만나니 나는 열이 뻗쳐서 참지 못하고.. 디스플러스를 집어 들고 아저씨를 한번 노려본 뒤 그것을 계산대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참지 못하고'라고 하기엔 좀 소심한가?)
그러자 그 감정 과소비 아저씨는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라며 더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더니 나를 신고하겠다고 소리쳤다. 도대체 어디에 무슨 죄로 신고한다는 말인가? 좀 웃겼다. "나 담배 안 사!!!"라고 하길래 '나도 너한테 안 팔아!!!'하고 싶었지만, 아저씨한테 혹시라도 얻어맞으면 내 손해이기 때문에 조용히 담배를 집어 제자리에 두었다.
아저씨는 씩씩거리며 유리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런데 비가 억수같이 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는 씩씩거리며 다시 계산대로 돌아왔다. "아 그냥 다시 줘!!"라며 담배를 다시 내놓으라고 했다. 물론 마음은 '싫어!! 안 팔아!!'하고 싶었지만, 아저씨가 충분히 여자도 때릴 것같이 생겨서 그냥 팔았다.
날씨는 예보를 찾아보고 준비한다지만, 진상은 예측도 준비도 어렵고 적응은 훨씬 더 어렵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인간에게 인간됨을 기대하기 때문에 자연재해보다 인재사고에 더 열이 뻗치게 마련이다.
날씨예보는 있어도 진상 예보는 없기에, 나는 때때로 편의점 계산대 안쪽에서 화가 잔뜩 난 진상들에게 준비 없이 당했다. 그래도 여럿을 상대하며 한 가지 터득한 멘탈 방어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연민'이다.
어디서 얼마나 대접을 못 받고 무시를 당했으면 편순이에게 반말을 하며 갑질을 하려 드는 걸까?
얼마나 가진 게 적고 배운 게 없으면 낯선 이에게 저렇게 무례할 수 있을까?
으휴 인간아 너도 참 불쌍하다.
증오과 분노는 나를 갉아먹지만 연민은 그렇지 않다. 갑질 하는 저 인간에게 나는 결코 너에게 을이 아님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정신승리라고 해도 좋다. 진상이 전혀 없는 세상은 기대하기 어렵고, 중요한 것은 나의 기분과 마음이므로. '업신여기는 마음'은 진상들의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다.
앞으로도 예고없이 찾아오는 무례한 사람들에게 절대 기회를 주지않겠다고 다짐한다.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 그리고 어이없는 갑질을 하며 나를 을로 만들어버리는 기회.
으휴 저 진상, 불쌍한 인간
그저 한 마디하고 다 잊으면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