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떠나면 모두 이방인
그곳에서 가장 낯선 이방인일수록 타인의 도움의 역할은 크고 절실하다. 낯선 땅을 여행할 때 그 나라말로 인사말과 감사 표현을 반드시 외워두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예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책 없는 여행자로서 나는 늘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가장 극적인 도움을 받았던 기억은 내 생의 첫 외국이었던 시드니에서였다. 스무 살의 버킷리스트였던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스물한 살이 되는 해에는 '외국에서 1년 살기'를 실천하기 위해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지금은 여행계획을 즐기는 편이지만, 그 당시의 나는 좀 극단적으로 준비성이 없는 인간이었다. 아마 준비성이 부족한 낙관주의는 꽤나 성공적이었던 9박 10일의 자전거 여행 탓인지도 몰랐다. 어느 지역에 언제 도착해서 어디에 짐을 풀고 잠을 청할지 정하지 않고도 우리는 늘 안전한 밤을 보냈다. 어느 날은 스님께 감사했고, 어느 날은 목사님께, 또 어느 날은 마을 이장님께 감사했다.
호주에는 배낭여행자들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백패커가 도시 곳곳에 위치해있다고 여행 가이드 책은 내게 말해주었다. 시드니 도심을 대충 그려놓은 작은 네모칸 안에는 백패커를 나타내는 작은 점들이 무수히 표시되어있었다. 무서울 것이 뭐 있겠나, 나는 이미 자는 곳이라고 지정되지 않은 곳에서도 밤을 보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여행책자와 파고다에서 급히 두 달간 배운 영어회화실력, 그리고 비행기표 티켓이 내가 준비했던 전부였다. 시드니에 도착해서 적당한 백패커에 들어가서 짐을 풀고 현지 어학원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셰어하우스도 알아보면 되겠지, 나는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처맞기 전까지는.
센트럴에 있는 다섯 곳의 백패커가 모두 풀이었다. 하이드파크로 걸어 나와서 주변 백패커를 찾아갔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데스크에 앉은 직원들은 모두 '마디그라 축제'때문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내가 도착한 2월 첫째 주의 주말에는 시드니에서 마디그라 축제가 열렸다. 마디그라 축제는 역사가 꽤 있는 시드니 퀴어축제였다. 세계적인 축제답게 지구 곳곳에서 성소수자들이 시드니를 방문했다. 부지런한 그들은 다수의 침대를 차지했고, 나야말로 그날 밤거리에 나앉을 극소수자들 중 하나였다.
거대한 트렁크를 끌고 시드니시내를 활보하다가 나는 극적으로 비행기에서 알게 된 언니를 만났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지!! 라며 기쁨의 함성을 질렀는데, 그 언니도 백패커에 자리가 없어서 돌아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아 제기랄. 오늘 밤이 무서운 불안한 눈동자는 두배로 늘었다. 그래도 그 언니를 만난 것이 그날의 행운이었던 것은 맞다. 그 언니가 시드니에 위치한 한인교회 연락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믿음과 종교가 생길 수 있구나, 생각하며 한인교회에 찾아가서 사정을 하고 단기간 머무를 곳을 부탁했다. 나와 그 언니는 시드니 시내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인 조용한 동네에서 2주간 단기 셰어를 하게 되었다. 출퇴근 시간이면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세대쯤은 타보지도 못하고 그냥 보내야 하는 그런 동네였는데, 나는 그 집에 너무 감사해서 몇 주간은 수요예배도 참여했다.
물론 교회에서 엄금하는 퀴어축제에 참여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안정적으로 몸 뉘 일 곳이 생긴 뒤로는 교회도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잊지 않고자 하는 것은 나도 언젠가는 낯선 곳에 도착한, 난관에 봉착한 누군가를 돕겠다는 마음이다. 대가 없이 베푼 약간의 호의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하는 행운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수차례 느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호의와 환대의 엔트로피를 믿는다. 그것은 무질서하게 팽창하며 수혜자를 늘려간다. 도움을 받아본 자는 다 안다. 나도 언젠간 갚아주겠다는 다짐, 그것이 무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