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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Jul 14. 2021

내 글의 주인공은 내 글을 읽었을까?

글감이 되어줘서 고마웠어요.

세원아,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


얼마 전 헤어진 지 2년 된 전 남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뜻밖의 연락에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뭐지? 혹시 내 글 읽었나?'였다. 그와 나는 5개월 남짓 짧은 시간을 만났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내 글 속에 박제되었다. 구원이라 믿었던 사랑이 준비 없는 이별을 선언했던 최초의 기억이었다. 내 안의 긍정 파워를 억지로 끌어올려 이별의 슬픔뿐만 아니라 슬픔과의 이별까지도 배웠다고, 글 속에서 성숙해진 나는 그를 원망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런데 2년 만에 그가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이 개새끼가?"라는 말이 육성으로 절로 나왔다. 그는 정말 내 글을 읽었을까?


작년부터 젊은 작가들의 신작 소설에 관해 '지인에 대한 폭로 논란'이 간간이 들려오고 있다. 김봉곤의 '그런 생활'이나 김세희 작가의 '항구의 사랑'을 읽고 그 이후 차례로 판매 중단을 하느니 마니 하는 소식을 출판사 sns에서 읽으면서, 오버 같지만 그때도 내 글에 대해 생각했다. 다행히 내 글들은 그리 유명세를 탈일도 없거니와, 사회에서 그들이 특정될만한 묘사는 나름 자제했기 때문에 아직 틴더남들에게 항의 연락을 받지는 않고 있다. 지인에 대한 폭로는 당연히 조심해야겠지만, 글을 쓰다 보면 우리 주변부에 대해 쓰는 것을 피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경험이 풍부하고 오래 글을 써온 작가들이라면 자르고 붙이고 만들어내며 창의적인 스토리를 탄생시킬 수 있겠지만, 몇몇 비범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초보 작가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는 정말 쉽지가 않다. (나는 소설보다 에세이를 쓰기도 하고..)우리가 흔히 떠 올릴 수 있는 작가들의 첫 작품들이 주로 자전적 내용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오랜 친구가 글쓰기를 시작했다며 sns에 글 몇 개를 올렸다. 그녀는 그곳에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어려움이나, 천사 같은 남편을 어렵게 만나게 된 이야기들을 감정과 함께 적어두었다. 그런데 내가 놀랐던 뜻밖의 부분은 십여 년이 훌쩍 넘은 대학 입시 실패에 대한 글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느낄 정도로 그 부분에 있어서 그녀가 현명해 보였는데도 말이다. 그 해묵은 이야기 속에는 아직 살아있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 당시의 슬픔과 고통은 그 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감히 짐작하게 하는 글이었다. 오래 전의 아픔을 글로 적는다는 것. 그것은 긴 시간으로도 다독일 수 없는 마음은 글쓰기로 다독여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듯 자전적인 내용 속에는 늘 슬픔과 고통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글을 쓸 때 가장 쉽지 않은 것을 가장 쉬이 꺼내놓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이나 고통을 완전히 배제하고 즐거운 글만 쓰라고 하면 글쓰기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다.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치유를 위해 글쓰기를 시작한 것인지, 글을 쓰다 보면 누구나 결국 아픔을 쓰게 되는 것인지 선후관계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글쓰기는 고통과 연결되어있다.


나는 내 고통을 희화화하는 것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저 슬픔을 즐겁게 바꾸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성장시킨다’는 니체의 명언은 글 속에서 더 분명했다. 고통이라는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했다. 그것은 뜻밖의 깨달음을 불러오기도 했고 종국엔 꽤 맘에 드는 글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공교롭게도 내 고통의 얘기가 연애 얘기였고 상대방은 가끔 불가피하게 희화화되었던 것이다.(그러나 누군지 아무도 모를 테니 고소는 하지 말아 주길 바란다.)


그래서 정말 그 개새끼가 내 글을 읽고 연락을 해온 것이냐고? 내 글이 유명세와 무관해서 애석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 내 글을 읽고 연락해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고민하다 연락했다며 미안하다는 하나 마나 한 식상한 얘기와, 2년 전 내게 맞춤정장을 만들어주겠다던 약속을 지키고 싶다는 꽤나 신박한 변명을 섞어가며 지껄였다. 단단히 취한 게 틀림없었다. 그에게 따져 들고 싶었던 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다시 평정심을 찾았다. 그는 나에게 글감을 여러 개 주었고, 나는 그에게 후회와 미련을 남겨주었으니, 가슴 벅차게 아름다운 결말이었다.


정말   속의 당사자들이 본인에 대한 글을 읽으면 어떤 반응을 할까? 몇몇은 변명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테지.  몇몇은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을 느낄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들이 어떻든지 간에 나는 그들 모두에게 다양한 이유로 고맙다. 즐거운 경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뜻밖의 고통을 주었던 경험일수록  안에 묵직한 것들을 남겨주었기 때문에 말이다. 앎은 고통이지만 알고나면 무지의 세계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법이다. 언제나 고통은  뜻한 바가 아니었지만, 고마웠다. 결국 전부 뜻밖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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