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을 비워내기를..
바야흐로 글감 보릿고개다. 오늘은 브런치를 시작한 지 325일째 되는 날이었다.
초반에는 적어두었던 몇몇 글들을 가열차게 올렸고, 평소에 글로 풀어내고 싶었던 생각들도 열심히 적었다. 묵혀두었던 문장들도 살을 붙여가며 완성하고 발행했다. 그런데 요즘, 대체 뭘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행히도 올해 초부터 글쓰기 모임(슬기로운 작가 생활-아그레아블)을 진행하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꾸역꾸역 글을 쓰고는 있지만, 그 덕이 아니었다면 '꾸준한 글쓰기'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우리 문우 여러분 사랑합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가만히 생각해본다.
요즘 더 이상 내 글감의 원천인 '틴더'나 '소개팅'을 하지 않아서 일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마음에 파장이 일어나고 고통이나 고뇌, 혹은 적어도 약간의 심적 동요를 느끼고 그것을 극복할 때에만 글이 써지냐는 말이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잔잔해 보인다. 생각해보면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이냐?'의 결론이 무서워 글쓰기가 어려운 것도 있다. 몇 년 전 어떤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이 자는 모든 글을 깨달음과 교훈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강박에 있는 게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쩌면 내가 바로 그 상태가 아닌가 싶다.
뿐만 아니라 글쓰기 모임에서 합평을 하다 보면 훌륭한 글을 쓰고 좋은 평을 듣고자 욕심을 부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결론이나 핵심이 있는 글이 뇌리에 남고 결국 잊히지 않아야 좋은 글이라는 잘못된 집착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느꼈던 소소한 마음을 적어내는 것은 언제나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럼 이제 내 삶의 중요 포인트들(소소하지 않고 임팩트가 강한 것들..)은 모두 글로 옮겨진 걸까? 그것도 아니면서..
요즘 책을 잘 읽지 않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인풋 없이 아웃풋을 짜내는 꼴이 아주 위태롭다. 이미 홀쭉한 치약을 '이번까지만..' 하며 힘주어 짜는 심정으로 모임 과제를 매주 하나씩 짜내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넷플이네 유튜브네 재밌는 영상 추천을 주고받는 사람들 속에서 '저는 텍스트를 더 좋아해서요..'라고 지적인 척 하는 재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는데, 이제는 틈틈이 침착맨이나 피식대학으로 모든 쉴틈을 매워두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훌륭한 유투버들이다.) 책은 침대 머리맡에, 가방 속에, 조수석에, 방바닥에 한 권씩 모두 80페이지 남짓 읽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영상 지구력보다 텍스트 지구력이 강하다고 웃기는 소리를 하더니 이제 짧은 10분짜리 영상들에 남은 지구력을 다 해보고 있다. 물론 그것들도 훌륭한 인풋 일수 있으나, 내가 스스로 소화할 필요 없는 내용을 휘발되지 않도록 잡아내는 능력은 너무 어려운 능력 아니냐고..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인풋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 며칠 전 모임 멤버 한 분이 복잡한 생각이 턱까지 차오르면 소설도, 에세이도, 어떤 것도 읽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순간 그것이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그분은 그럴 때 심연의 나를 만나기 위해 일기를 쓴다고 하셨다. 파고 파고 또 파고 들어가 보면, '그래 너였구나'하는 순간이 온다고. 나는 바로 그날 집에 오는 길에 펜을 잡고 지하철 의자에 앉아 새우등을 하고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글을 썼다. 아주 오랜만에 오직 나를 위한 글을.
그리고 너였다.
한동안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스무고개 같다고 생각했다. 네가 품은 마음의 모양이 무엇인지 수십 번 추측해보는 일. 늘 최악을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일.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한 수 앞을 더 내다보려는 일.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바빠서 나는 글도 잘 쓰지 못했다.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 '너도 내 마음과 같을까?' 끝없이 추측해보는 마음이 한심해서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무언가를 갖고 싶으면 집착이 생긴다. 마음으로 집착하면서도 좋아하는 감정을 모른 척하는 것은 다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겠지. 끝없이 추측하느라 괴로운 이 망할 스무고개를 때려치우려면 감정을 받아들이고 집착은 버려야 하지 않을까.
솔직함이 서툴고 어리석은 사랑의 특징인 듯 말하고, 쿨함이 이기는 연애의 필수요소인 듯 말하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솔직하고 뜨겁게 해 보고도 아파야 한다면 아파야 할 테지. 바라는 게 없다는 것은 참 어렵고 쉬운 감정이다. 그 마음을 먹기는 어려웠으나 그 마음을 두고 너를 보니 나는 어쩐지 조금 편안해지는 듯하다.
어쨌든 글감 보릿고개든 사랑의 스무고개든 넘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니 전부 다 집착 때문이다. 좋은 글에 대한 집착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도 다 나를 빈곤하게 만드는 기분이다. 다시 차오르기 위해 집착을 비워내 보자 다짐해본다. 비워내면 더 가볍게 잘 넘어갈 수 있겠지. 이번 고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