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봐
열 살 때 엄마를 따라 얕은 언덕에 위치한 작은 절에 간 적이 있다. 보름달이 뜬 밤도 아니었고, 내 생일도 아니었고, 동전을 던지지도 않았는데도 엄마는 소원을 빌라고 했다. 나는 작은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빌었다. '행복하게 해 주세요..' 얕은 언덕을 도로 내려오며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지금 행복한데 또 행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되는 거야? 욕심부린다고 부처님이 안 들어주시면 어떡하지?' 그때 엄마는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아마 정확한 엄마의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 걸 보니 내 우려를 잠재울 만큼 설득력이 있던 건 아니었었나 보다. 행복한데도 또 행복하게 해달라고 해도 되는 건가.. 내 욕심이 사람들의 소원을 주관하는 분을 불쾌하게 할까 봐 어린 마음에 며칠을 고심했다.
그 시절 나의 신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거나 십자가에 못 박혀있지 않았다. 나의 신은 작은 내 방 천장에 투박한 모양의 야광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자기 전에 불을 끄면 빛을 머금어 선명해 보이는 야광별에게 나는 자주 말을 걸었다. 지금 행복하지만 계속 행복하게 해 주세요. 나는 10살 때부터 소원 빌 기회가 생기면 늘 변함없이 같은 소원을 빌었다. (소원은 비밀로 해야 효력이 있다는 말이 있어서 공개하자니 조금 초조하다.)
행복의 조건은 점점 복잡해져서, 혹은 누구 말대로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어서, 나이를 먹고부터는 열 살 한세원의 행복 수준을 유지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어쩌면 욕심을 부렸던 게 잘못된 거였는지도 모른다. 가족이 아프고 계획한 일이 어그러지고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나는 이제 좀 행복하면 안 되겠냐고 더 이상 믿지도 않는 신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급한 성격 그대로 그 슬픈 감정이 빨리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던 시기에 우연히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주제를 타고 가다가 행복과 행복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내면이 단단하고 유쾌해 보이는 여성분 한분이 내 뒤통수를 쾅 때리는 말씀을 하셨다. "꼭 매번 행복해야 하나요? 불행한 순간도 내 삶의 일부인데, 그냥 순간에 감사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행복을 들볶으며 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내 마음만 행복하다면 장땡이라는 행복 만능주의는 어쩌면 힘든 시기에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다시 행복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조급한 마음은 나를 전혀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며칠 전에도 행복을 들볶았던 적이 있다. 입만 열면 누군가의 험담을 하며 내 기분을 싸하게 했던 동창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내가 가장 불행했던 시기를 들먹이며 나를 분노케 했는데, 적당히 넘기지 못하고 나는 결국 화를 냈다. 나를 성깔 있는 년으로 생각했다면 성공이었을 텐데, 아무래도 그 친구에게 나는 그저 불행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화를 내는 불쌍한 친구로 보였음이 틀림없었다.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 행복할 수가 없었다. 왜 쿨하지 못해서 화를 내고 불행을 느껴야 하는가.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다시 행복해야겠다고 조급증을 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끔은 행복할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참 어렵다. 나는 (아마도) 평범한 사람이고, 분노나 우울함 같은 것도 사람의 감정이니까 괜찮다고, 결벽적으로 안 좋은 감정을 쓸어버리려고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고. 이제는 어쩌면 소원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행복하게 해 주세요'보다는 '매번 행복하지는 않아도 감사하게 해 주세요'라고. 불행 속에서도 감사한 부분을 찾아서 불행한 시간도 내편으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행복할 필요 없다는 이상한 다짐.
잘 실천할 수 있을까? 아마 아주 잘 해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