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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Oct 04. 2021

누구나 잊히기를 바라는 시기가 있다.

저마다 삶의 굴곡이 달라서

설명이 좀 길게 필요하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을 할 때면 말이다. 일단 청첩장 주려는 거 아니고, 옥장판 파는 거 아니고, 보험회사 다니는 거 아니고, 차도 안 팔아. 그냥, 잘 지내지?


서른을 갓 넘을 때까지만 해도 뜬금없이 멀어진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안부를 묻곤 했다. 몇 년간 연락이 끊긴 친구들에게도 문득 생각이 나면 주저 없이 문자를 보내고 어쩔 땐 전화를 걸었다. 잊고 지낸 세월이 빚인 양 말하며 '봐야지. 봐야지'하는 친구에게 언제인지 콕 집어서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연락에 소극적인 친구들은 나를 신기해했다.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냐고 묻기도 했는데, 나는 왜 단순한 안부 연락을 거절하겠냐며 반문했더랬다. 아마 나는 태생이 그런 사람인 것이다.


몇 년 전 호찌민에 살던 친구가 잠깐 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때도 역시 내가 연락책 역할을 도맡아 열명 가까이 되는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별생각 없이 살던 17살 친구들은 이제 앞자리가 두 번이나 바뀌고 서른이 되어있었다. 누구는 남편이 생기고, 누구는 아내가 생기고, 누구는 대기업에 취직했으며, 누구는 스타트업을 차려서 대표가 되었다. 우리는 연남동 치킨집에 모여 근황에 대해 잠시 얘기하고, 공유하던 그 시절에 대해 오래 얘기했다.


그 자리에 세븐은 오지 않았다. 안부를 묻고, 다른 친구들의 소식을 전하고,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리며 꼭 나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나에게 세븐은 못 이기듯 알겠다는 대답을 했었다. 그리고 당일날 일이 생겨서 가지 못하겠다는 짧은 문자를 남겼다. 그 문자를 보자 나는 단박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품을 들여 모아 놓고 나면 사람들은 언제나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그런데도 내 연락을 보험사 아웃바운드 정도로 여기는 친구가 있다니 섭섭함이 몰려왔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이런 것일까, 나는 생각했다.


한동안 이런 어리고 옹졸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고, 그것이 사라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과 생각의 확장이 필요했다. 너는 내가 아니고, 누구나 잊히기를 바라는 시기가 있다는 생각.


같은 추억을 공유해도 저마다 삶의 굴곡은 같지가 아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시기를 살았다. 졸업식 때까지만 해도 너와 나는 다를 것이 없었는데, 이십 대의 경험과 운이 우리의 위치를 꽤나 다르게 만들어버렸다. 나중에 전해 들은 바로 세븐은 호주와 중국에서 짧게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 방황을 하다가, 공무원 시험을  해간 준비 했고 결국 포기를 했다고 했다. 그의 마음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보다 완성된 작품을 내보이고 싶은 창작자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서른을 넘어 하나둘 자리를 잡은 (혹은 그런  보이는) 친구들을 보면서,  또한  굴곡만 야속하게 깊다는 생각에 한동안 숨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잊히기를 바라는 시기가 나에게도 왔던 것이다. 그럴 때는 응당 잊어주는 것이 도리인 줄도 모르고, 얼굴을 보자고 내가 닦달을  것은 아닐까. 씁쓸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몇 달 전 6년 만에 오랜 친구 지영이를 만났다.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친구였고 언제나 궁금했던 친구였으나, 준비와 도약 사이의 기간이 유난히 길었던 탓에 6년을 잊은 듯 살았다. 아직 의사가 되려면 몇 년은 있어야 된다고 말하지만, 지영이는 알을 깨고 나왔다. '돌팔이 안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지'라며 환하게 웃는 지영이의 미소를 보면서 잊지 않고 연락해준 마음에 고마움을 느꼈다. (나도 의사 절친 있다...) 잊은 듯 살던 친구가 잊지 않고 돌아오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세븐은 잘 지낼까? 망각하고 지내다 문득 생각이 난다. 그때 만나자고 닦달하던 내가 지겨워서 더 이상 연락을 안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미안하다고..) 그래도 그게 아니라면 연락이나 만남 없이 긴 시간이 지난 것에 마음 쓰지 말기를, 행여나 그것을 마음의 부채로 여기지 말기를.


잊히고 싶은 계절을 지나서 잊을 수 없이 행복한 계절을 맞이하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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