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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Nov 21. 2021

자식을 기다린다, 기다려주지 않는다.

'집에 언제오냐'라는 엄마의 질문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을 갔다. 소위 '날라리'는 전혀 아니었지만, 그 나이 어린애가 다 그렇듯 나는 친구들과 노는 게 제일 좋은 사춘기 여중생이었다. 그 시절은 펌프에 동전을 쌓아놓고 내 차례를 기다리며 맨바닥에서 스텝을 연구하던 시절이자, 마이크를 독차지하려고 친구들이 따라 부르지 못할 신박한 곡을 연습하던 시절이었다. 병명으로도 유명한 '중2', 나는 방과 후 오락실이나 노래방을 들르지 않고서는 뒤통수가 당겨서 쉽게 귀가하지 못했고, 그것이 엄마의 속을 점점 까맣게 태웠을 터였다. 열 살 때부터(초등학교 땐 스쿨버스를 타고, 중학교 땐 지하철을 타고) 무리 없이 등하교하던 서울 변두리에서 일산 화정으로 학교를 옮기게 된 것은 다 그 이유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전학 가는 게 재밌을 것 같다며 순순히 엄마 말을 따랐다.)


무난했던 고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술 먹는 나이가 되었을 때, 엄마는 또 늦어지는 내 귀갓길 때문에 속을 끓였다. 내가 유독 튼튼한 간과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탓도 있지만, 대학생활이라는 것은 원래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것 아니겠는가? 10시쯤부터 엄마는 '어디냐? 언제 오냐?'라고 걱정의 문자를 보내기 바빴고, 나는 '응, 금방 갈 거야~'하고 거짓말 치기 바빴다. 그리고 그것마저 귀찮아질 때는 아예 덮어놓고 모른척하기 일쑤였다.


어쩌면 내 나이와 엄마의 걱정이 반비례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서른이 넘어도 나는 철들기 어렵고 엄마도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한동안 영 정신을 못 차려서, 혹은 사는 게 너무 내 맘 같지 않아서 술을 퍼마시던 때가 있었다. 그때 아마 엄마와의 사이가 가장 나빴을 것이다. 일찍 좀 다니라는 엄마 말에 제발 나한테 신경 좀 끄라고 신경질을 부렸으니.


부모는 자식이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쓸데없이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귀가를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도 이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래도 술은 여전히 끊지 못했다. 그래서 술을 먹다 귀가가 늦어지면 현관문 앞에서 '엄마가 제발 깊이 잠들어있길!'하고 바라는 날들이 여전히 많다. 그런 날이면 현관문 도어록은 왜 그렇게 유난히 큰소리로 삑삑거리는지.. 엄마가 쫓아와서 방문을 열고 '으휴 술 좋아하는 건 아주 누구랑 똑 닮았네'하고 잔소리를 쏟아내는 것도 역시 여전하다. 한 집에 산다면 아마 마흔이 넘어도 똑같지 않을까?


술을 싫어하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누구랑 똑 닮았네'에서 '누구'를 맡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술을 퍼마시던 시기에도 아빠는 늘 쿨하게 반응했다. 예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 우리 언니가 나처럼 한동안 술을 퍼마시고 돌아다닐 때였다. 어느 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도착했는데 택시비가 없었다고 했다. 언니는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읽던 아빠를 불러냈다. 아빠는 택시비를 내줬고, 택시 아저씨는 이 새벽에 택시비를 내달라고 아빠를 부르는 언니나, 부른다고 잠자코 내려오는 아빠나, 둘 다 대단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집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에서 아빠는 언니에게 딱 한마디를 했다. "너도 좀 다른 취미를 가져보는 게 어떻겠니?"


엄마 아빠가 둘이 서로 안 맞는다고 할지는 몰라도(가끔 서로 가만히 좀 있으라고 한다), 딸 입장에서는 훌륭한 밸런스가 아닐 수 없다. 철없을 때는 집요한 엄마와 관심 없는 아빠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면 둘 다 나를 기다려주고 있는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과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의 차이일 뿐.


그런데 며칠 전 아빠와 엄마의 귀가를 애타게 기다린 적이 있다. 평범한 목요일 저녁이었는데, 가족 단톡방에 아빠가 '엄마 데리고 응급실 간다'라는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전화를 해봐도 받지 않고 몇 시간째 연락도 오지 않았다. 언니에게 전화해봐도 역시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왜 도대체 연락이 안 되는 거야. 기다리는 사람 걱정하는데..." 나는 엄마가 수많은 밤동안 혼자 중얼거렸을법한 그 말을 똑같이 중얼거렸다.


엄마에게 뇌경색이 발견된 것은 2년 전이었다. 병새가 심각하지 않고 평소 건강관리를 열심히 해온 덕에 많이 호전되기는 했으나, 그때부터 엄마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엄마 할머니 되지 말라고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았다!!'라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엄마가 늙어가는데 나는 속수무책이다. 아마 늦은 밤 끓탕을 하게 하며 엄마를 더 늙게 만들었다면 그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응급실에 갔다고 연락이 온 지 네시간만에 엄마와 아빠는 집에 돌아왔다.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가 있을까 봐 걱정돼서 그저 fMRI를 찍고 왔다고, 아빠 폰이 이상해서 연락이 안 됐던 것이라고 했다. 예방차원에서 다녀온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나서야 언니도 나도 그날 밤 안도하며 잠에 들었다.


오늘도 엄마는 여전히 내 귀가시간을 묻는다. "짱딸은 몇 시에 오냐?" 엄마가 언제나 기다려주면 좋으련만. 늦은 밤 일을 마치고 들어가 엄마의 굽은 등을 본다. 내가 애를 낳지 않아도 엄마는 결국 할머니가 될 것이다. 엄마의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부모는 자식을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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