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소망 사랑 중에 믿음이 우선이거늘...
"우리 이제 만난 지 한 달이나 되었나?"
그가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그와 나는 마스크를 쓰고 만나서 벚꽃축제도 없는 허전한 봄날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고작 한 달 만난 사이였다. 그 한 달 사이 그는 내게 미래에 대한 얘기를 무척 적극적으로 말하곤 했다. 물론 상상력으로는 단 며칠을 만나도 결혼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거라지만, 단순한 상상력으로 상견례 시기를 구체적으로 물어보진 않으니까 말이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하고, 야심이 있으며 취미로 바이크를 타고, 부족할 것 없이 자란 듯 보이는, 그는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때쯤 인생을 꽤나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의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의심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언니, 그 사람이 나한테 빨리 결혼하자는데, 좀 모자란 사람이 분명하다..." 나의 친언니는 내 말에 동의했다. 내가 너무나 괜찮은 사람이라서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으며, 놓치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결혼을 추진하고 있다는 핑크빛 상상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믿고 싶은 것과 믿음이 가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예전에는 무턱대고 연애 낙관주의에 빠지곤 했다. 지나고 보면 명백히 위독했던 관계 속에서도 상대를 믿고, 내 판단력을 과신하며 시간과 정신력을 낭비했더랬다. 아마 과거의 숱한 실패의 고통은 성장통이었던 것일까. (아니.. 실패의 고통도, 실패의 좋은 점도 너무 쓸데없이 많이 알게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내가 이제 연애 통찰력이 아주 뛰어난 고수가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예전에는 더 바보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뿐..
어쨌든 핑크빛 상상을 하는 사람이 유독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것도 아니다. 원래 자기 일이나 자기 연애라는 게 상황을 냉정하게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고, 원래 훈수 두는 입장일때 더 수가 잘 보이는 법 아니겠는가.
그리고 퍼즐이 맞춰진 것은 바로 그날 일이었다. 그가 만난 지 한 달이 되었는지 내게 묻던 그날, 호숫가에 조성된 벤치에 앉아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를 보며 평범한 데이트를 하던 날이었다. 그는 내게 할 말이 있다며 운을 뗐다. '그래, 뭔데? 이렇게 평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돌싱이라고 고백했다. '법적으로는' 싱글이라고 덧붙여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그게 무슨 차이가 있겠나 싶었다. 주변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버진로드를 걸어들어가 사람들앞에서 선서를 했을텐데 말이다. (돌아온 것도 여러사람이 알테고)
이제 나도 그런 나이가 된 걸까. 주변 친구들 모두가 결혼을 한걸보면 그가 돌싱인것도 그리 놀라운게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는 단지 내가 아직 해본적없는 실수를 했던 셈이다. (그 실수가 좀 치명적이라는 것도 사실이고)
돌싱이라는 것도 품어줄 만큼 나의 애정이 커졌는지를 가늠해보고 있을때, 그는 연이어 더 강력한 사실을 폭로했다. 그의 나이가 나보다 8살이나 많다는 것. 돌싱인것을 숨기려고 나이까지 속였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했다. 한달동안이나 뻔뻔하게 나를 누나라고 불렀는데... 하 진짜 돌았나?
반나절정도는 그래도 헤어지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비혼주의가 아니고서야 헤어지는 연인들에게 쉽게 떠오르는 그 생각, '하.. 또 어디가서 누구를 만나야하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음이 맞는 누군가와 맺어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일인가. 서른을 넘으니 더 어려워지고, 맺어진 후에는 금새 끊어질까 자주 조바심이 났다. 이제 좀 정상적인 연애를 안정적 궤도권으로 진입시켰다는 생각이 드는 한달이었는데, 그는 나에게 예상치못한 강펀치를 두대나 갈긴것이다. 하.. 또 어디가서 누구를 만나 또 그 지겨운 과정을 반복해야하나.. 그냥 돌싱사기꾼을 꾹 참고 만나야하나? 마음이 나약해져서 순간 끔찍한 결정을 내릴뻔 했다.
역시 그럴땐 믿음이 중요하다. 나 이 사람말고도 다시 누구든 만날수 있다! 꼭 다시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다! 그런 믿음. 그리고 연애는 믿음이 중요하다. 상대에 대한 믿음 없이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인데, 가장 기본적인 신상을 속이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연애를 하겠냐는 말이다. (직업이나 학벌 그밖의 그에 대한 모든것이 나는 아직도 의심스럽다.)
그에게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을 전하고, 나는 언니에게 '근 3년간 했던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며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정말 칭찬을 받아 마땅했다는 것은 그후에 더 명확해졌다. 이별후 그의 행동이나 변명은 듣는 사람마다 눈쌀을 지푸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간 그는 전화를 하고, 동네에 찾아오고, 장문의 카톡과 이메일을 보냈다. 나도 그의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는 나보다 더욱더 '하 이제 또 어디가서 누구를 만나야하나'하는 생각에 괴로웠을 것이다.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낭비했고 핸디캡도 더 많았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흉하게 매달리며 변명해야했을까?
자기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며 내 기억 속에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고 흉하게 발악을 했고, 나에게 결국 안좋은 소리를 듣고나서야 변명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의 노력과는 반하게 그는 영원히 구질구질한 돌싱 사기꾼으로 남아있다. 그냥 나의 실패 에피소드 중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