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고 만족하는 여행은 위기로 시작된다.
2021년 10월 21일 오후 다섯 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누리호를 발사시켰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나는 코로나 발발 이후 첫 해외여행 신호탄을 터트렸다. 샌프란시스코 7박 8일. 나에게 첫 번째 미대륙 여행이기도 했다.
탑승구 앞에 줄지어선 의자에 앉아 티브이에서 중계하는 누리호 발사 카운트다운을 보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리호가 하늘을 찌르며 솟아오를 때 나도 한국인답게 소원을 빌었다. "즐겁고 안전한 여행하게 해 주세요"(한국인들이 너무 많은 소원을 빌어서 궤도 진입에 실패했다는 얘기가 있어 송구스럽다.)
우리는 코로나 시국을 겪으며 앞으로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올라갔을까 아니면 내려갔을까? 대부분은 코로나 이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하며 갑갑한 여행 절차와 과정을 예견할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그만큼 만족감의 허들은 한없이 낮아진 것이 아닌가? '그저 비행기만 타도 좋아요~'라며 상공을 빙빙 돌다가 돌아오는 여행상품까지 생겼을 지경이니까 말이다.
나에게도 이번 여행이 그랬다. 여행 내내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보고도 '오 제발 갈 수 있게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올렸던 것은 어이없게 단지 코로나 때문만도 아니었다.
여행경력 십수 년 차이자, 코로나 시대 2년 차 시민으로서 나름 여행 준비는 철저했다고 생각했다. 우선, 대략 여행 한 달 전에 밴쿠버를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는 에어캐나다 항공권을 78만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예약했다. 1년 10개월 만에 꺼낸 여권의 만료기한을 잘 확인했고, ESTA(미국 여행허가증)는 미리 일주일 전에 신청해서 승인되었다는 메일을 받자마자 프린트를 해두었다.
위드코로나 여행이니만큼 코로나 시대의 여행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몇 주 전부터 여행 선배들의 블로그에서 관련 정보들을 살뜰히 챙겨 읽었다. 샌프란에 사는 친구가 영문 백신 접종증명서가 없으면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신신당부를 해서 예방접종 도우미 누리집을 통해 다운로드하여 두장이나 프린트해두었다. 출국 이틀 전에는 항원검사도 받았다. 비행기 탑승 시 그리고 미국 입국 시 필요한 PCR 검사는 비교적 저렴한 항원검사로 대체할 수 있다는 꿀팁을 발견하고는 항원검사를 시행하는 동네병원에 이틀 전에 찾아가서 성실히 검사를 받았다.
미국 입국 시 필요한 서류
1. ESTA (승인 후 프린트해두는 것이 좋다.)
https://esta.cbp.dhs.gov/
2. 영문 백신 접종증명서 (접종 완료 후 14일 경과된 것. 예방접종 도우미 누리집에서 인증 후 출력)
3. 출국 72시간 이내 음성 PCR 검사서 or 항원 검사서 (공항에서도 받을 수 있으나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가능하면 동네에서 받는 것 추천.)
환전도 카드수수료와 비교하며 적당히 해두었고 미국에서 일주일 동안 사용할 유심칩도 구입했다. 미국은 우버를 주로 탄다고 하니 우버 어플도 받고, 여행기간 동안 머무를 친구 집과 주변 가볼 만한 곳들도 구글맵에 열심히 별표를 해두었다.
출국 당일에도 서류를 넣은 파일을 다섯 번이나 더 확인했고, 여권도 헷갈리지 않게 정해진 위치에 잘 넣어두고 집을 나설 채비를 했다. 그런데 코로나 전에는 40분에 한 대씩 집 앞을 지나갔던 공항버스가 어느새 하루에 4대만 운행하는 보기 드문 버스로 변해있었다. 공항을 가는 사람들이 대폭 줄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버스가 없는 것쯤은 큰 위기도 아니었다. 나에겐 엄마 찬스가 있기 때문에... 엄마는 고맙게도 미국 놀러 간다고 혼자 신난 철없는 딸을 공항까지 태워다 주고 잘 놀다 오라고 용돈까지 쥐어주셨다.
나는 말 잘 듣는 모범생처럼 항공사의 권고대로 공항에 3시간 전 도착했다. 체크인을 위해 에어캐나다 부스에 줄을 서서 '이제 미국 입국심사만 잘 통과하면 되겠지?' 다음 단계를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는데..
제길.. 히든 스테이지처럼.. 나만 몰랐던 숨겨진 단계가 있었던 것!!
내가 구매한 항공권은 밴쿠버를 고작 두 시간 경유하여 샌프란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였는데, 에어캐나다 직원은 꽤 편안한 얼굴로 '캐나다 eTA(캐나다 여행허가증)를 신청하지 않으면 출국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더 자세히는, 당장 신청하면 72시간 안으로 승인받을 수 있는데, 3시간 안에 나올 수도 있으니 당장 신청하라고 했고, 만약 나오지 않으면 나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 자빠질 지경인데 이렇게 편안하게 안내를 해준다고?
어쨌든 직원은 친절하게도 캐나다 eTA 신청을 도와주었다. 내 신상을 신청 형식에 적어 넣는 동안 나는 손이 벌벌 떨었다. 오늘 나 출국 못하는 건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카드정보를 입력해서 7달러를 결제하자, 신청이 완료되었으니 72시간 안에 답은 준다는 메일이 왔다. 내 비행기는 3시간도 안돼서 뜨는데 말이다. 미국 ESTA가 승인되는데 반나절 이상은 걸린 것을 보면, 캐나다 eTA도 그쯤 하지 않을까?
왜 몰랐지? 왜 캐나다 비자는 생각도 안 했지? 아니 고작 두 시간 경유하는데 비자가 필요하다고 야무지게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나? 자책하다가, 이 이상한 시스템을 탓하다가, 그 순간 해결책 따위는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그렇게 '이제 어쩌나..' 하며 몇 분간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데, 메일함에 바로 캐나다 eTA승인을 알리는 메일이 와있는 게 아닌가!!! 아~뭐~야~나 놀랬잖아~라며 에어캐나다 직원의 등짝이라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그녀는 규정대로 이야기했을 뿐이겠지?
검색해보니 캐나다 eTA는 10분 안에 승인 났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나만 행운의 여행자 일리는 없지. 그렇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이제 여행을 떠날 수가 있는데 말이다. 빠른 승인 정말 감사합니다...
*최종 목적지가 다른 나라더라도 캐나다를 경유하는 경우 반드시 eTA를 신청하고 승인받아야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다.
https://www.canada.ca/en/immigration-refugees-citizenship/services/visit-canada/eta/apply-ko.html
드디어 티켓을 받아 들고 내 비행기가 뜨는 탑승구로 걸어가며 생각하니 참 우스웠다.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인지하는 것은 수십 번 철저하게 확인했는데, 사실 나에게 위기를 안겨준 것은 아예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눈 오는 날 맨발이라는 것은 인지하지도 못하고 두꺼운 외투만 수십 번 확인한 꼴이랄까?
eTA 승인은 매우 쉬운 것이었지만, 사실 밴쿠버를 지나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해보니 eTA의 요구는 왠지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마치 캐나다와 미국 간의 비행을 국내선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밴쿠버에서는 경유인데도 불구하고 입국심사가 까다롭다고 느꼈는데,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해서는 마치 김포공항에 들어온 듯 아무런 심사 없이 출구로 쑥 나와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 순간에도 나는 미국 땅에 온 것에 무한 감사를 했다...
여행 초반부터 위기를 맞으니, 비행기가 제시간에 뜨고 내리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캐나다 공항에 발을 들일수 있는 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 분명했다. 만족감의 허들이 낮아서 이후 여행의 모든 부분이 만족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공항에서부터 가슴 철렁할 필요는 없으니 캐나다를 경유하는 분들은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