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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Jan 12. 2022

머뭇거리던 그 남자의 후기

우유부단함과 배려심의 차이

그와 틴더에서 매칭이 됐던 것은 3년 전의 일이었다. 핑퐁처럼 주고받는 그와의 메시지는 가볍게 통통 튀어 서로에게 가 닿았고, 나는 그것이 즐거워서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쥐고 웃었다. 그에게 나름 적극적으로 오프라인 만남을 제안했던 것은 온라인만큼 오프라인에서도 분명 즐거우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상대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와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불편함을 넘어 약간 불쾌하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마치 세차게 흔드는 나의 손인사에 상대가 눈짓으로만 작게 알은체를 할 때 느끼는 민망함과 같은 것이었다.


만나는 날짜도 시간도 내가 정했다. '세원 씨가 편하신 때, 편하신 곳에서'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내가 느낀 것은 배려심이 전혀 아니었다. '편하실 때 만나요'라고 반복할 때는 만나기를 꺼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와 소심하게 '됐어요. 안 만나요'하기도 우스운 일이었다.


만나기로 한 당일, 을지로 3가가 어떠냐는 내 메시지에 그가 짧게 '후'하고 한숨을 적어 보냈다. '후? 야이씨 그럼 만나지 말던가..' 하는 마음이 올라와서 주먹을 쥐게 만드는 한 글자였다. "그럼 그냥 오늘은 집에서 쉬시고 다음에 보시죠?" 화면을 꾹꾹 눌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이다.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은지, 그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나에게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송구할 정도로 사과를 하기에 진짜 나를 배려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랬다 저랬다 하기 싫은 마음에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서로 싸인이 안 맞은 것 같네요. 푹 쉬세요.'하고 맺음말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대로 만나지 않으면 스스로 영영 후회를 할 것 같다느니, 오늘 꼭 맛있는 것을 대접해서 사죄하겠다느니, 계속 사과를 해서 나를 민망하게 했다.  그래서 결국 그와 나는 을지로에서 첫 만남을 하게 되었다.


이제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앞선 예상대로 오프라인의 대화 역시 통통 튀는 핑퐁 같았다. 그는 재미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까르르 웃을 때마다 그는 '아니 오늘  나오셨으면 어쩔뻔했어요?' 라며 나를 놀렸다. '완전히 졌다, 분하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을지로의 늦은 밤, 우리의 대화는 지난 연애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남의 연애를 듣는 것에 취미가 있는 나는 그의 이전 연애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었다. 그는 듣고 싶다면 기꺼이 말해주겠다며 전 애인을 만나게 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버스에 올라탔는데, 같이 탄 여성분이 너무 제 이상형이었어요.”


그가 졸업한 이후로 오랜만에 학교를 찾아갔던 날이었다.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그 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에 대한 묘사는 하지 않았지만 이상형이 귀엽고 선한 인상이라고 했으니 그녀가 아마 그런 인상이었을 것이다. 버스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내내 그는 창밖의 위치를 확인하는 척하며 그녀를 수없이 곁눈질했다. 버스는 학교 정문에서 가까운 정류장에 그와 그녀, 그리고 많은 학생들을 쏟아내고 떠났다. 그가 버스에서 내려 머뭇거리는 동안 그녀는 많은 학생들 사이에 섞여서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정문으로 가는 뒷길을 이용해서 빠르게 달려가는 것이다. 정문에 도착해서 그녀가 보이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번호를 물어봐야지. 그는 더 머뭇거리지 않을 이유를 찾기 위해 스스로 내기를 걸었다. 정문에서 그는 그녀를 발견했고 결국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남자 친구가 없다는 그녀의 말에 용기를 내서 자기 번호를 건넸다.


“제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꺼진 상태였어요. 저는 그게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그녀가 먼저 저한테 연락하는 것이 부담스러울까 봐서요”


'과한 배려심이 아닌가? 연락하기 싫을 수도 있는데'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것까지는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 둘은 만남을 시작했다고 했다. 머뭇거렸다는 그의 부분적 묘사와는 달리 전체적으로는 꽤나 용기 있는 에피소드였다.

그러나 그는 나를 만나는 내내 머뭇거렸다. 늘 나를 배려하려는 태도, 나의 결정을 기다리는 자세 때문에 나는 헷갈렸고, 마음이 조급해져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것은 바로 어장관리?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는 클리셰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나는 그를 놓아버렸다.(가라- 썸남몬) 그는 내가 연락을 끊을까 봐 불안해하다가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내 말을 듣고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지난해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많이 좋아했었다고. 만남이 이어지지 못해서 아쉬웠다고. 이제 전혀 의미 없는 말이 되었지만, 어떤 바보같은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를 헷갈리게 할 수도 있었던 것일까?


그가 20대의 적극성을 갖기에는 이제 늙었다고 이해하더라도 우리는 운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를 생각하면 버스정류장에서 정문까지 달리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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