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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Dec 22. 2021

이별의 크리스마스

타이페이의 추억

12월의 대만은 따뜻했다. 가끔 해가 뜨고, 자주 비가 내렸다. 확실히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여행이었다. 그런데도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끔찍했다고 쓰려고 보니 그렇게 나쁘기만 했었나 싶기도 하다. 기내에 올라타면서부터 눈물을 쏟았는데도 말이다. 나는 혼자 비행기에 앉아 울었다. 원래부터 혼자 출발할 계획은 아니었다. 인천공항에 올 때까지만 해도 S와 함께 대만에서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연인으로서 서운했던 감정들도 다 정리하고 오리라 마음을 먹고 있던 참이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공항에서 S와 함께 셀프체크인을 위해 정보를 입력하던 때였다. 아니지, 문제는 훨씬 더 이전에 생겨났지만, 그때 '발견'되었다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S의 여권정보를 입력해 넣을 때마다 화면에는 문제가 있으니 카운터에서 확인하라는 문구가 연달아 나왔다. 불길한 마음으로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시도하자, 직원으로부터 S는 지금 비행기에 탑승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유는 여권 만료기한이 고작 한 달 정도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만은 여권 만료기한이 6개월 이상 남아있어야 입국이 가능한 나라 중 하나였다.


S는 화를 냈다. "항공사는 대체 뭘 하는 거야? 이런 건 발권할 때 미리 공지해줘야 하는 거 아냐??" 씩씩거리는 S는 항공사를 탓했지만, 미리 공지해줬다 해도 그는 몰랐을 것이다. 여행 준비라고는 전날 밤 짐을 싼 것이 전부인 그가 그걸 무슨 수로 알았겠나. 티켓팅과 숙소 예약, 이런저런 여행 계획들은 모두 내 차지였다. 물론 귀찮지 않고 즐겁게 했던 터라 불만은 없었다. 아마 항공권 티켓팅 과정에서 여권 만료기한에 대한 안내사항이 팝업창으로 떴을 것이다. 그것을 나는 별생각 없이 넘겼을 것이다. 왜냐면 내 여권 만료기한은 9년이나 남아있었으니까. 항공사는 대체 뭘 한 거냐며 씩씩거리는 그의 분노는 그렇다면 나를 향한 것인가? 책임이 내 것 같아서 그의 분노 역시 내 것처럼 느껴졌다.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 빨리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내게, 그는 가만히 좀 있어보라며 머리를 움켜줬다. 화가 누그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폭탄처럼 터질 것 같은 그의 벌건 얼굴을 보며, 폭발물이 설치된 공항을 잠시 상상했다. 폭발물 처리 요원들이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는 모습 그리고 폭탄 같은 우리 사이.


우리의  해외여행지는 방콕이었다.  당시 태국은 반정부 시위로 국내 상황이 좋지 않았고, 가네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여행 둘째  비상계엄령이 내려져서 숙소에 돌아가지 못하고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 묶여있었다.  번째 해외여행지는 호찌민이었다. S 여행기간과 중요한 프로젝트가 겹친다는 것을 여행 가기 직전에 깨달았고, 결국 이틀간 ( 1) 여행을 하고 나서 나를 호찌민에 두고 떠났다. 공항을 거쳐 여행을 떠날 때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을 두고 ' 진짜 항장애냐?'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그가 진짜 공황장애라는 것이  농담의 포인트였다.


S는 다음날 긴급여권을 만들어서 따라오겠노라고 약속했고, 나는 혼자 대만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자리에 앉아 나는 마치 한동안 생이별을 하는 사람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슬픈 건 그날의 사건이 아니라 그날의 우리였다. 대만에서 우리는 손도 잡지 않고 걸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타이베이 시내에는 거대한 트리들과 반짝이는 전구들로 가득했다. 나는 많이 웃으려고 노력하다가, 그 노력이 슬퍼서 결국 대만 술을 마시고는 또 울었다. 그는 나를 안아주지도 않았고 나도 그에게 기대지 않았다.


여행 마지막 날 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장례는 짧았다. 반면에 우리의 이별은 그렇지 않았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보다, 그가 내 세상을 떠날 때 나는 더 많이 울게 됐다. 그를 다 죽이는 데는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긴 연애기간만큼 긴 애도기간이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대만을 억울할 것이다. 화려한 불빛으로 치장한 시내 거리와 매 초마다 색깔을 바꿔가며 자태를 뽐내는 101 빌딩. 크리스마스를 멋지게 보낼 훌륭한 도시를 품고도 이별하는 남녀에게는 전혀 소용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언젠가는 꼭 다시 그곳에 가고 싶다.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흐린 눈으로 봐야만 했던 타이페이의 크리스마스

흐린눈으로 보아야했던 그해 대만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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