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과의 연애, 자기 계발서와의 이별
그는 고전소설이었다. 처자식을 버리고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 소설의 주인공은 6펜스를 버리고 달을 좇는 비범인이었다. 현실을 사는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꿈을 좇는 그는 결국 위대한 예술가로 죽었다. 실제로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쓰였다는 그 소설, 가장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동안 내 대답은 망설임도 없이 '달과 6펜스'였다.
망할 예술을 한답시고 내 마음을 갑갑하고 안타깝게 할 때마다, 나는 그를 이해하는 방식을 스스로 찾아야만 했다. 사랑하면 이해해야 했으니까. 그것이 그 당시 내가 고전소설에 푹 빠졌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개인의 예술성과 도덕성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할 때도, 그 예술성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행동을 일삼은 건 아니었지만, 그는 확실히 연인으로서 지탄받을만했다.)
어떤 몰입은 나쁘다. 그리고 빠져나와 생각해보니 인생은 고갱이나 고흐보다 피카소처럼 살아야 맞다. (피카소도 난봉꾼이었지만) 사후의 명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그는 사후에 유명해질 리가 없는 예술만 해댔다. 그의 짠내 나는 인생은 사랑할 때 내내 고전소설 같았지만 이별하고는 내내 과태료 고지서 뭉치와 같았다.
그는 베스트셀러 맨 앞줄에 놓인 경제 서적이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선 추월차선에 서야 하고, 그전에 이미 성공을 느끼는 마인드를 갖춰야 하며, 돈의 속성을 깨우쳐서 돈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전소설에서 벗어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만났던 남자였다. 삶을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사는 모습이 꽤나 멋져 보였다. 아마 과태료 고지서 뭉치 같은 전 남자 친구의 흔적이 그의 매력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
마케팅업이라는 그의 직업에 걸맞게 그는 자신을 브랜드화하는데 대단히 능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있어 보이기'위해 고전소설의 첫 문장을 불어로 외우거나, 논어의 문장들을 줄줄 읊었다. 그리고 내가 모임에 나갈 때는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줘라' 하고 응원을 했다. 그것은 내 철학과는 맞지 않는 응원이었다. 난 대단하지 않을뿐더러 모임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하는 것이 내 목표이지, 나를 뽐내려고 모임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가스라이팅 인지도 몰랐다. 아마 그도 몰랐을 것이다. 7년 된 내 작은 경차를 내다 팔고 새 차를 사려고 알아볼 때에도 그는 자기 계발서 같은 조언을 열심히 해댔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부와 성공을 느끼기 위해서 고급 세단을 사야 했다. 왜냐면 그것은 결국 나를 더 큰 부와 성공으로 데려다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은 숱한 자기 계발서들처럼 꽤나 그럴듯하게 들렸다
앞뒤 생각 없이 고급 세단을 향해 돌진하던 나는 (할부 노예계약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다행히 막판에 그와 헤어지고 코너 드리프트를 하며 겨우 카푸어 인생을 모면하게 되었다. 그는 나와 헤어지기 전날에도 돈의 속성을 따르기 위해 예약 주문했던 천육백만 원짜리 (12개월 할부) 명품시계를 찾아왔다. 차 없이 뚜벅이였던 그는 백화점에 버스를 타고 갔을까? 아니면 지하철을 타고 갔을까? 아니 그보다, 그는 드디어 부자가 되었을까?
지난주 월요일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던 책장정리를 끝냈다. 고전소설에 푹 빠졌던 시기부터 책을 줄기차게 모으다 보니 4단 철제 선반이 모자라서 작년에는 비좁은 방에 3단 나무 선반을 하나 더 들였다. 이제 선반을 흘러넘치고 책장 주변까지 쌓여있는 책들은 ‘이게 애정이냐 미련이냐’ 내게 따져 묻는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쉰두 권을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아치우고, 열 권은 그 책을 반길만한 좋은 주인들에게 선물했다. 열두 권은 어쩌지 못해 버리고 서른 권은 집 앞 도서관에 기증을 했다. 그중에는 늘 내가 가장 좋아한다고 대답하던 그 책들도 모두 담겨있었다. 미련을 버리고 더 좋은 책을 찾아 나서야지.
이제는 어떤 책을 만나서 사랑하고 싶냐면,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저질 매거진이나 가벼운 팸플릿은 제발 아니기를..) 그러나 바라건대 함께 책장을 채울 수 있는 사랑이면 좋겠다. 한 침대에 누워서 각자 독서등을 하나씩 차지하고, 잠들기 전까지 각자 좋아하는 책의 책장을 넘기며 편안히 밤을 보내는… 그의 책이 소설이든 자기 계발서든 에세이든 정말이지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