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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Jun 15. 2022

내가 느꼈던 연애 우울증

고백하건데, 개인주의자들을 사랑했고 미워했다.

이차선 도로를 능숙하게 빠져나와 좌측 깜빡이를 켰다. 곧 강변북로를 탈 것이다. 그럼 이내 집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불안한 와중에 드는 짧은 안도감이었다. 낮과 밤을 함께 보냈고, 다시 밝은 대낮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꽤나 긴 데이트. 연인과의 데이트는 언제나 현실에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하게 만드는 특수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늘 조바심이라는 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렇게나 섹스를 하고서 느끼는 공허함이나, 분수에 넘치는 행복을 안고 불안해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그저 피곤함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아직 다 읽지 못한 책과 써야 하는 글, 숙제처럼 밀어둔 은행업무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놀러 갔던 놀이공원에서 폐장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들은 것처럼.


그날의 일기를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날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날은 하루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며칠 무슨 요일인지 따지는 것도, 그날의 상대가 누구였는지 따지는 것도 소용없다. 그저 외로움이 병인줄로만 알았다. 일기에는 어쩐지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같다고 쓰여있었다. 내일부터는 아주 다른 세상 사람처럼 연락도 없이 사라지게   같다고도 쓰여있었다. 사랑은 무언가를 소모시키는 일이었던가? 하고 물음표도 진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들의 이유를 알지 못해서  일기는 글이 되지 못했다.


나는 함께해야만 차오르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그들은, 내가 사랑했던 그들은, 모두 나 없는 세상에 돌아가서 나와는 아주 별개로 충전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나도 결국엔 그것을 인정하고 아주 잘 받아들이는 척해야 했는데, 왜냐면 더 외로운 쪽이 늘 어리고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누구든 각자의 시간은 소중하잖아.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도 늘 함께하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어. 그렇게 이해를 하고자 하면, 스스로 어른스럽고 이성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 자랑스럽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매번 붙잡고 내 쪽으로 당기면 당길수록 반대급부로 멀어진다는 느낌은 어김없이 옅은 우울감을 줬다. 그것이 바로 여자들이 흔히 말하는 연애 우울증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그렇게 찾아 헤매면서도, 그 시작에서는 늘 지옥에 떨어지는 상상부터 했던 것도 다 그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늘 멍청하고 용감했다. 스스로가 선인장인 줄 알고 사막에서 막 피어버린 수선화처럼. 스스로를 채근하고 교정해야 했던(그럼에도 결국 교정이 완성된 적이 없었던) 연애는 이따금 마음을 황량하게 했으므로. 모자이크 같은 감정들이 이제 멀어지고 나서야 윤곽이 선명해진다. 강변북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3호선 대화행 지하철 안에서, 광화문을 떠나는 1900번 버스 안에서, 나를 의아하게 했던 옅은 우울감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혼자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에게 무겁게 의존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한동안 개인주의자를 사랑하며 앓았던 사람이었다. (아니면 그들은 '개인주의자'라는 말 뒤에 숨어서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맞춰갈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위험했던가.) 그리고 내가 수선화라는 것을, 사막에서 필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술과 사랑에 대해서라면 단언은 피해야하겠지만, 그럼에도 다시는 사막에서 꽃 피우지 않겠다. 혼자보다 둘이 더 외로운 아픈 사랑은 하지않겠다.


수선화의 꽃말 : 자기애, 자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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