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연애는 닮아있고, 이별은 가지각색이다
어쩌다 연애전문가로 잘못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별 전문가인데. 이별이 늘 내 연애의 일부였으니까, 포괄적 의미로 연애전문가라고 해도 되는 건가? 하긴, 따지고 보면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도, 사랑이 맺어지는 순간은 이별의 순간보다 단 하나 더 많을 뿐이다. (헤어져야만 새 사랑이 시작된다는 평범한 전제하에) 그리고 연애'전문가'라니... 자기 연애에 전문인 사람이 어딨겠나. 누구나 남의 연애에 대해서만, 혹은 그때의 내가 마치 남처럼 느껴지게 되었을 때에만, 현자의 말을 쏟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전문가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도, 어차피 연애라는 것은 학위도 없는 분야가 아닌가. 나도 고민할 만큼 고민해본 사람인데, 전문가인척 하고 연애 토론을 이끌고 가도 욕먹을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연애 관련 소셜 모임을 진행하게 된 것은 더운 공기가 이따금 훅하고 느껴지는 늦봄 무렵이었다. 첫 모임의 주요 콘텐츠는 넷플에서 대유행 중인 '솔로 지옥'과 '나는 솔로'와 같은 연애 매칭 프로그램이었다. 영철이 누구를 선택했는지, 프리지아가 누구랑 수영했는지 따위의 이야기는 한없이 가벼운 가십거리 같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감정들은 한때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인생을 흔들었던 그것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흔들림을 견딘 것들은 모두 내면 깊숙이 단단한 뿌리가 자라나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것은 연애를 통해 자라난 우리의 성장기 모임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거창하게 소개하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그렇게 홍보할 수 없었다.)
또 틴더를 홍보해버렸다. 그들에게 자만추와 소개팅, 심지어 헌팅에 비해 틴더(그 외 비슷한 소개팅 어플)의 위치는 위태로운 것이었다. 다들 위험하다고 경계하는 모습이 요즘 사람(?) 같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임에 모인 분들인가 싶기도 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나면 좋겠다는 그들에게 '그게 그렇게 나쁜 어플은 아니거든요' 하고 또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틴더를, 사실은 내 브런치에 있는 '틴더 연애 표류기' 글을 홍보했다. 단지 구독자 수와 조회수 늘리기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연애를 데이터의 축적으로 말하겠다는 오만함이었을 것이다. 한동안 그 알량한 데이터로 보통의 연애에 귀납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충 비슷한 사례의 집합으로 결론을 도출해내는 일반화같은 것 말이다.
그 오만함은 연애꼰대를 만든다. 그들은 '나 때는 말이야~' 대신 '나 썸 탈 때는 말이야~, 나 연애할 때는 말이야~, 나 이별할 때는 말이야~'하고 남의 연애에 훈수를 둔다. 꼰대처럼 가끔 당연하고 맞는 말을 하면서도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고, 자주 쓸데없는 말로 남의 연애를 망친다. 모두 본인의 데이터에 갇혀서 상황을 바라보고 입을 열기 때문이다. 연애 데이터는 노련함을 주기보다는 편견을 만드는데 더 큰 역할을 하는데도 말이다. 나는 꼰대가 되기 싫고, 연애 꼰대는 더더욱 되고 싶지 않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빌려 표현하자면, 행복한 연애는 서로 닮아있는 반면에, 맺어지지 못한 연애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모로 나의 꼰대력을 잠재워주지 않았나 싶다. 그들은 내가 아니고, 상황은 정말 가지각색이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입을 닫고 지갑을 열라고 했던가? 지난달 나는 조용히 입을 닫고 소개팅을 여섯 명에게나 주선했다. 그리고 세 커플 모두 저마다 다른 이유로 맺어지지 못했다. 뚜쟁이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기 마련이지만, 들려오지 않는 소식은 굳이 묻지 않는다.
연애전문가는 되고 싶었던 적도 없고 그런 게 존재하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저 앞으로 내 연애나 소소하게 잘 끌고 나가자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연애 글을 이따금 올리며, 모임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나는 단연 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