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쓰게 되지만, '발행'에는 결심이 필요하니까
칠레에 간다고 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1년 반 전의 일이었다. 틴더에서 만나면 으레 그렇듯, 단번의 인상으로 향후 관계의 노선이 결정되는데 그는 좀 애매했다. 유쾌했고 매력적이었으며 아주 자유로워 보였다. 시대를 막론하고 자유롭고 매력적인 남자는 언제나 위험했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좀 지쳤고, 그에게 나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냥 친구가 되었다. 쓸데없이. 그가 진행하는 영화 모임을 함께 몇 차례 했고, 나는 가끔 그의 틴더 후기를 들었으며 그는 가끔 내 틴더 후기를 읽었다. 칠레에 간다는 소식을 알려주던 날도 그는 마지막 후기를 들려주었다.
이제 적절한 때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마지막 그녀에게 고백을 했는데, 그녀는 생각이 좀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의 마지막 썸은 그렇게 뜨뜻미지근하게 끝이 났다. 그녀를 놓쳤다는 것보다 자신의 안테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에 (이번엔 진짜 잘되는 줄 알았거든요...라고 그가 말했다.) 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물론 '제 연애 안테나가 고장이 나서 이 땅을 떠나렵니다'하고 칠레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시절 그가 암스테르담에서 잠깐 인턴생활을 했던 회사가 칠레에도 지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일할 좋은 기회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거절도 약간의 역할을 했으리라. 아니면 자유로운 그의 영혼을 내가 잘 보았는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간다는 소식은 대단한 것이었다.
글을 쓴다고 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을 알았다. 자가출판 워크숍을 통해 출간 도전을 하겠다고 SNS에 올렸을 때도 그는 응원해주었다. 칠레로 떠나는 그에게 출간된 내 책을 선물해 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구 반대편에도 내 책이 존재할 텐데 말이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책은 결심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엉성한 내 글들로 책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계속 쓰고 있겠다고 했다.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대범함까지는 아니지만, 글을 쓰고 발행하는 것도 늘 용기를 필요로 했으므로.
그는 내 글쓰기 모임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에게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조급하고 용기 없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단번에 아주 좋은 글을 써내고 싶은 사람들 말이다. 꾸준히 쓰는 것 말고 왕도가 반드시 있다고 믿는 사람들. 좋은 글을 쓰고 싶지만 스스로에게서는 그런 글이 나오지 않아서 글쓰기를 중단해버리는 사람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그에게 물었다. 종국에 만족하려면 그만큼 불만족스러운 글들을 용기 있게 쏟아내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대범한 그는 내게 아주 크게 동의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근데 본인도 책을 안 내고 있잖아요."
동의를 얻는 대신 나는 크게 혼이 났다. 내가 한 말은 모두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책을 쓸 테다'라고 결심한 지 1년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조급하고 아주 용기가 없어서, 단번에 아주 좋은 책을 쓰고 싶었고, 나에게서 그런 책이 나올 리가 없어서 책 쓰기를 중단해버렸다. 심지어 독립출판사를 만들어서 신고하고 내 글을 모아 가제본까지 인쇄를 했다가, 결과물을 마주하고는 모든 것을 접고 도망쳤다. 그런데도 그게 결심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단지 마지막 결심을 남겨두고 말이다.
칠레는 7월에 설산이 장관이었다. 그의 SNS 사진에는 전부 이국적인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용기 있는 결심으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 그가 또 한 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나를 혼낼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혼날만했다. 반성하고 좋은 책을 써야겠다. 아니 아니, 좋은 책 말고. 책을 써야겠다.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