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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Jul 01. 2022

우는 연기, 슬픈 노래로 오디션을 보는 이유

슬픔, 글쓰기의 자양분

"이대로는 감정이 좀 부족하지 않을까?"

연기 오디션을 앞둔 예전 남자 친구의 대본을 수정해준 적이 있다. 보는 사람에게 감정이 전달되는  연기의 핵심이라면, 그의 대본은 핵심에서 약간 엇나간  보였다. 그것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아리송한 평서문의 연속이었다. 사실 뭐니 뭐니 해도 문제는 연기력이었을 것이다. 대배우라면 잔잔한 문장으로도 감정이 느껴지는  높은 장면을 만들어낼  있을 테니까. 아마추어 연기자가 단번에 실력을 보여주려면, 역시 대놓고 분노하거나 눈물을 짜내는 서글픈 연기가  쉬울 것이다. 격하면 격할수록 보는 사람에게 감정이 정확히 전달될 테니 말이다. (대본이 문제였는지, 연기력이 문제였는지, 어쨌든  남자 친구는 오디션에 합격하지 못했다.)


수많은 오디션 프로를 생각해보면 노래 또한 마찬가지다. 유튜브에서 심사위원들에게 All pass를 받은 오디션 참가자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애절하게 부르는 곡이었는데, 곡의 중반까지 4명의 심사위원 중 아무도 pass를 누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클라이맥스에 다 달았을 때, 한 심사위원이 pass를 눌렀고, 그에 반응해서 참가자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남은 소절을 이어갔다. 그러자 남은 심사위원들 모두 pass를 눌렀다. 장면에서 드러나는 감정이 너무 극적이라 그 영상의 조회수는 500만 회를 넘어버렸다. 그냥 잔잔한 노래를 잘 불러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왠지 내게 에세이 쓰기는 오디션이 아닌데도 이와 비슷한 구석들이 있다. 주로 어두운 내면의 그늘을 써낼 때 더 많이 감동을 주고 공감을 받았다. 에세이도 연기나 노래처럼 감정을 매만지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흔들림 없는 평온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아마 글을 쓰지 못할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돌아보면 언제나 행복은 평온하고 잔잔한 것들이었고, 우울과 슬픔, 고통은 뚜렷하고 명징한 것들이었다. 평온하고 잔잔한 걸들로는 지루한 글이 완성되거나, 애초에 쓰는 일조차 지루해서 몇 자를 적어내지도 못했다. 물론 다 내가 아마추어라서 그렇겠지만.


심지어 나의 다정한 문우들 중에는, 행복할 때 전혀 글을 쓰지 않는다는 분도 있었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오직 행복과 멀리 있을 때뿐이라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지리멸렬한 연애감정과 외로움은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였고, 행복과 가까운 평온함은 오히려 내 글을 곤궁하게 만들었으므로. 나의 글쓰기에 대하여, 나의 다정한 문우님에 대하여, 나는 양가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을 바란다면 절필해야 하는 것이고, 꾸준히 좋은 글을 써내고자 한다면 어둠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글을 쓰지 않고 행복하고 싶다던 그는 글쓰기로 돌아왔다. 또 하나의 글감을 가지고.


물론 불행을 양분 삼아 깊이감 있는 글을 써낸다 해도, 나는 불행을 바랄 위인은 못된다. 행복하면 쓸게 없다고 재수 없는 소리를 해서, 세상을 주관하는 분의(만약 있다면) 눈밖에 날까 봐 두렵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어찌 보면 글쓰기는 불행을 상쇄하는 작은 사은품일 뿐이니까. 그저 내 글이 지루할 땐 마음의 잔잔함에 감사하는 수밖에, 슬픔의 감정이 찾아올 땐 이 또한 글감이 될 수 있음에 안도하는 수밖에.


문우님들의 행복과 꾸준한 글쓰기 모두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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