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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May 31. 2022

보그지에는 별자리 운세가 없다.

운보다 의지보다 '태도'라는 것

휴일 맞이 피부과 방문을 했다. 예약의 의미가 내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것인지, 정시에 도착하고도 이름이 호명되기까지 어쩐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화이트톤의 병원 내부에는 그와 잘 어울리는 마카롱 모양의 연보라색 소파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곳에 심심하게 앉아서 옆에 쌓여있던 잡지들 중 제일 위에 놓인 패션지 보그를 집어 들었다. 순서와 상관없이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겨봐도 재미날게 별로 없었다. 그럴 땐 역시 제일 뒤편으로 가서 이번 달 별자리 운세를 보는 게 소소한 재미인데... 엥? 보그지에는 별자리 운세가 없다.


보그지에 왜 별자리 운세가 없을까. 아무리 뒤적여도 없던데? 언제부터 없었을까? 혈액형도 별자리도 묻지 않고 오로지 MBTI만 집착하는 MZ세대를 겨냥한 잡지라서 그런가? 이번 달 운세는 어떨지 기대를 하며 얇은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겼데 실망스러운 기분이었다. 물론 이번 달에 내가 리딩 하는 모임에 모객이 얼마나 될지, 지난 모임처럼 원활하게 한 달을 또 보낼 수 있을지, 알량한 몇 글자의 별자리 운세가 정확히 알려줄지 만무하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난 언제나 이런 시시한 운세보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운명론적인 것들을 은근히 마음 한편에 담아두고 섬긴다.


재물복이 많고 자식에게 집착한다는 나의 사주풀이를 믿는다. 귀가 작으면 큰 성공을 이루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선, 전 남자 친구의 작은 귀를 보며 내가 먹여 살려야 하나 난감해하곤 했다. 손금을 봐주시는 분이 내 오른손에 성공선이 선명하다고 할 때는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이쯤 되면 열렬한 운명론자인가? 그렇다고 에피쿠로스가 설파하는 자유의지를 덮어놓고 무시하는 건 아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입꼬리수술로 '울상'에서 '웃상'으로 다시 태어난 내 친구가 생각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신봉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주기적으로 만나다 보면, '앞으로 내 운명은...?'이라는 생각에 도달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어쩔땐 좀 자주..)


지난 글쓰기 모임에는 좀 특이한 멤버가 있었다. 모임 상세 페이지에 분명 이 모임이 글쓰기 모임이며, 매주 한 편의 글쓰기 과제가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분은 이 모임이 독서모임인줄 알고 등록했다고 하셨다. '환불받는 과정이 복잡한 것 같아서 그냥 왔어요. 운명인가 봅니다.'라고 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왕 온 김에 글을 써보시겠다는 그분은 첫 주에 예상대로 헐거운 글을 써냈다. 가볍게 쓴 글에도 도움을 꽉꽉 채워 넣는 합평이었기 때문에 피드백은 꽤나 더 날카로웠을지도 몰랐다. 혹시 그냥 써보기로 했던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을까? 그런데 웬걸, 다음 주 그분의 글은 내 걱정과 달리 커다란 보폭으로 한걸음 성장해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주 역시 또 커-다한 걸음으로 한걸음, 모임이 다 끝나고선, 이왕 쓰는 김에 한 달 더 해보겠다며 모임등록을 또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주, 그분은 브런치 작가에 합격했다. 그뿐이 아니다. 다음 메인에 우리가 함께 합평했던 글이 올라가서 작가가 되자마자 첫 글 조회수가 8천을 넘겠다. 우연 같은 운명은 그 작가님을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단지 독서모임인 줄 알고 글쓰기 모임에 잘못 들어왔을 뿐인데 말이다. 이제 그 작가님은 신이 나서 다음 글도 열심히 쓰고 있다. 혹시 이대로 출간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게 아닐까?


역시 운명이나 자유의지를 운운하는 것보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알면서도 가까이서 발견해야만 무릎을 탁 치고 자세를 바로 잡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진리들이다. 독서모임이 아니어서, 환불이 생각보다 어려워서, 짜증이 났다면 어땠을까? 글은 쓰기로 했지만 '이왕 쓰는 거 즐겁게 해 보자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의지와는 다른 운명을 만나고서도, 그 속에서 결국 기쁘게 나만의 것을 하나 찾아내는 일. 그것은 운명이나 자유의지가 아니라 '태도'가 하는 일이다.


정말 많이 배우고 있다. 이번 글쓰기 모임도, 이번달의 운세도, 그것이 어떻든지, 나는 배우고자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또 많이 배우고 그 속에서 결국 기쁘게 나만의 것을 하나 (어쩌면 많이) 찾아내겠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정말 패션지에 별자리 운세가 없는 건 아쉬운 일이다. 운명론자는 아니더라도 재미로, 정말 재미로...!


대니얼 작가님을 소개합니다.

https://brunch.co.kr/@shyao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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