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하지 못하는 마음
빨간색 배번호를 붙이고 허둥지둥 상암 평화의 공원에 도착했다. 그곳이 하늘공원을 돌아 한강을 따라 달리는 서울신문 마라톤대회의 집결지였다. 한창 느긋하게 준비운동을 하고 있는 빨강, 파랑, 초록 배번호의 사람들을 뚫고, 나는 짐 맡기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배번호의 색깔은 달리는 거리에 따라, 하프는 빨강, 10킬로는 파랑, 5킬로는 초록으로 정해져 있었다.
대회 진행순서를 알리는 아나운서가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준비운동 동작을 설명하며 '하낫둘셋넷 둘둘셋넷' 박자를 넣고 있는 중이었다. 커다란 비닐백에 옷가지를 구겨 넣고 빠르게 짐 번호를 배정받는데, 어째 아랫배가 뻐근하게 아파온다. 느낌이 좋지가 않아.. 불안한 마음으로 화장실로 가보니 예정일보다 빨리 생리가 터졌다. 어쩐지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피곤하더라니.
구급의료팀에서 생리대를 얻어와서 다시 화장실에 다녀왔다. 주변에 빨간색 배번호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프 참가자들은 모두 출발한 것이다. 마라톤의 출발순서는 늘 오래 달리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이다. 나는 홈페이지에 명시된 대회 규정을 떠올렸다. 하프마라톤 제한시간 2시간 반. 이미 15분은 지난 것 같고, 나의 지난 하프 기록은 2시간 38분이었다.
뻐근한 아랫배를 잡고 시계를 보니 갑자기 눈물이 났다. 올해 하프 한번 뛰는 게 목표였는데, 삼개월간 집 앞 공원을 지루하게 달리며 준비했는데, 비록 저번 주에는 마셨지만 그래도 이번 주는 마라톤이라고 술 안 먹었는데.. 그런데 정말 도저히 2시간 안에 21킬로를 돌파할 자신이 없었다. 분명 중간쯤에서 행사차량에 수거되겠지. 아니, 이상태로는 너무 느려서 내가 마라톤 참가 중인지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잊힐지도 모른다. 황망하게 혼자 강변북로를 달려야 하면 어쩌지?
일단 눈물을 삼키며 출발선을 통과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늦게 출발한 빨간 배번호였다. 출발선은 빨강, 파랑, 초록 모두 같은 곳에서 시작하지만, 달리다 보면 길이 갈라지는 지점이 두 번 나오고 그곳에서 차례로 초록과 파랑, 빨강은 각자의 코스로 찢어지도록 되어있었다. 대회 진행 요원들은 갈림길에 서서 배번호 색깔을 확인하고 하프, 10킬로, 5킬로의 올바른 코스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나는 초록들과 이별하고 파랑들과 달리면서, 결심을 굳히고 빨간 배번호를 뜯어냈다. 삼개월간 준비했던 하프마라톤을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올해는 10킬로 메달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억울하거나 서러운 마음은 생리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한해에도 수많은 마라톤이 열리고, 꾸준히만 한다면 다음 해에 다시 도전해도 될 것이다. 빨강에서 파랑으로 마음을 바꾸고 나니 별스럽게 눈물까지 짜낸 것이 멋쩍어졌다. 물론 10킬로도 쉬운 거리가 아니어서 하늘공원의 꽃과 나무를 즐기며 즐겁게 마라톤을 마무리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하프 메달이 아니라 10킬로 메달을 목에 걸고 행사장을 빠져나오며, 하나 둘 들어오는 빨간 배번호들을 봤다. 잔근육으로 다부진 몸들이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피니시라인을 통과했다. 나는 아마 안됐을 거야, 생각하며 기념품이 잔뜩 든 가방에서 과자를 뜯어먹었다.
준비해오던 것을 시도조차 못했을 때, 가장 괴롭다고 느낀 것은 역시 '실패했다'는 감정이었다. 마라톤의 준비 과정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건강한 시간이었는데도 말이다. 패배감은 어찌 보면 집착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착은 가장 좋은 것도 허망한 것으로 바꿔버리는 악질적인 놈이다.
목표를 세웠으면 노력해야겠지만 너무 집착하지는 말아야지. 내 목표가 눈앞에 보이는 피니시라인 하나뿐만은 아니니까 말이다. 배번호의 색깔이나 메달에 쓰여있는 숫자보다 지치지 않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 마라톤 이후로 코로나 덕에 대회는 열리지 않고 있지만, 나 아직 지치지 않았다. 그러니 언젠가 열릴 하프를 기약해본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