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페치에 사는 내 친구 지영이
우리는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던 해에 만났다. 그리고 지영이가 언제부터 그 꿈을 꾸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그날로 가까운 지인에서부터 가벼운 안부를 묻는 사이까지, 사람들에게 쉽게 털어놓는 나와는 좀 다른 성격을 가졌으니까 말이다. 하기야 쉬이 꺼낼 수 있는 꿈은 아니었다. 첫 수능을 치던 나이에서부터 멀어질수록 더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지영이는 오랫동안 의사를 꿈꿨다. 몇 번의 시도가 무산되고 서른이 넘어서는 서울에 있는 제약회사를 다녔다. 이제 꿈을 접는 듯했으나, 그 작은 회사를 나와 또다시 꿈을 좇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페치 역은 아주 작아서 역사에는 아담한 대기실과 매표소만 있을 뿐이었다. 페치에 도착하기 직전, 지영이는 역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도착해서 캐리어를 끌며 작은 역사를 앞뒤로 다 돌아봐도 동양 여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하며 보이스톡을 걸자, 그 순간 지영이가 어디선가 웃음을 터트리며 나타났다.
"기다리는데 너무 떨려서 화장실 다녀왔잖아~ 나오지도 않아~ 그냥 떨려서 그런 거지"
그것이 오랜만에 만난 지영이의 첫마디였고, 나는 폭소를 터트렸다. 만나자마자 어떻게 이렇게 지영이는 한없이 지영이스러운 것인가. 이 소녀 같은 친구는 나와 내 남자 친구가 온다는 소식에 간밤에 잠도 설쳤다고 했다. 그곳에 살던 5년 간 한국에서 온 손님은 우리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한국 친구 1호는 심적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역에 도착했다.
나는 이 작은 기차역이 페치라는 도시를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헝가리의 아주 작은 시골마을. 야경이 화려한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세 시간이나 달려온 마을이었다. 지영이 없었다면 오지 않았을 동네였으므로 아는 것이라곤 그곳에 의대가 유명하다는 것뿐이었다. 지영이는 역을 출발해 본인의 작은 원룸으로 걸어가며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 헝가리에 관심이 없어서 모르고 있다가 이번 기회에 알게 된 것들이라고 했다. 관심 없다는 그 말은 이 땅의 생활이 지친다거나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는 것처럼 들려서 마음이 조금 짠했다.
작년 여름, 4년 만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 지영이는 무언가를 겨우 추스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를테면 꿈이 무산되는 공포와의 싸움과 같은.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유급을 당하며 시간과 돈을 더 써야 하는 많은 학생들 속에서 그간 얼마나 위태로웠을까. 그래도 이제는 좀 안정을 찾았다며 웃는 얼굴이 초등학교 시절 그 얼굴과 달라지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참 동안이라 다행이야..) 이제 좀 여유롭게 공부할 수 있다는 지영이에게 일종의 온라인 스터디그룹을 만들자고 했던 것은 나였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그날로 가까운 지인에서부터 가벼운 안부를 묻는 사이까지, 사람들에게 쉽게 털어놓는 성격을 가진 나는 관세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지영이와 소현이에게 말했고, 소현이도 마침 세무사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부터 매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꾸준히 우리의 하루를 공유했다. 내가 자격증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페치는 생각보다 작지 않았다. 그곳은 거대한 대학의 도시였다. 그러나 여러 개의 대학이 아니라 오직 유서 깊은 페치 대학만이 있을 뿐이었다. 페치 대학은 한국 대학의 캠퍼스와는 달리 도시 곳곳에 학과 건물이 분포되어있다. 우리는 페치가 대전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 신림동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페치에는 독특한 역사를 보여주는 건물도 많았다. 세네치 광장에 있는 거대한 모스크 사원은 오스만 튀르크가 이슬람 신을 위해서 건축했으나 이제는 십자가를 두고 가톨릭 성당으로 쓰였다. 유네스코로 지정된 문화재들을 보며 나는 페치가 경주 같다고도 말했다.
지영이네 집은 유명한 소설가의 이름을 딴 광장 앞에 위치해 있었다. 학교와 병원을 일부러 멀리 두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덕분에 관광지 중심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두 블록만 지나면 주인이 바뀌었다는 그 거대한 모스크 사원이 있었다. 그 앞으로 관광객 열댓 명이 하얀 관광 열차를 타려고 줄을 서있었다. 우리도 운 좋게 그 열차를 타고 페치 시내를 돌았다. 열차의 운전수는 좌우로 보이는 관광지들을 헝가리어로 안내했다. 지영이의 한국어 안내에는 본인이 공부하는 도서관도 있었고, 힘들 때 혼자 찾아가 노래를 부르는 공원도 있었다. (고성방가를 해도 주변에 주거건물이 전혀 없어서 괜찮다고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시 한 바퀴를 다 돌고 TV타워를 오르려다 버스를 잘 못 탔다. 조용한 산길을 걷다가 TV타워를 포기하고 동네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열 살 차이 나는 학교 친구들과 주로 간다는 페치의 김밥천국(?)을 제쳐 두고 훌륭한 헝가리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본인도 처음이라는 그 레스토랑에서 지영이는 신중하게 메뉴를 골랐다. 중간중간 그곳을 추천해준 학교 친구의 메시지를 컨닝하면서. 그리고 모든 메뉴가 훌륭했다.
저녁식사를 하던 중, 지영이가 우리의 온라인 스터디 그룹이 참 도움이 됐다는 말을 꺼냈다. 매일 친구의 공부 시간을 알리는 메시지가 시차와 국경을 넘어서 들려올 때 좋은 자극이 됐다고 했다. 그래서 공부 시간을 늘렸고 결국 지난 학기 장학금을 받았다고...
"근데 나 왜 눈물 나?"
원래도 눈물이 많은데 나이 드니 점점 더 많아진다. 내가 지영이의 5년을 감히 짐작하여 주책맞게 울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기특한 걸 어쩌나. 결국 해내는 지영이가 대단하고 대견하다.
우리는 2박 3일을 함께 보내고 헤어졌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급히 서로 인사를 나누고 떠났다. 너무 급하게 인사했다는 내 메시지에 지영이는 '금방 또 볼 것처럼 인사해서 오히려 좋았다'라고 답장을 해주었다. 2년 후에는 제주도를 함께 여행하자는 약속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얼마 후 나는 다시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제주도 여행에서는 내가 지영이에게 기특함을 뽐내며 감동을 주면 어떨까 싶어서.
지영아, 오늘도 아는 사람 없는 법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니? 늘 응원하고 있다. 이제 힘들어서 공원에 혼자 앉아 노래하고 질질 짜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내 친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