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부를때
말을 놓자고 했던 것은 그였다. 그는 거리감을 좁혀서 내 맞은편이 아니라 옆자리에 앉았는데, 도시 불빛이 명멸하는 한강변을 보기 위해서는 그렇게 앉는 수밖에는 없었다. 가로수길과 수직으로 만나는 도산대로는 압구정 방향으로 경사가 꽤 가팔랐다. 19층 호텔 건물이 그 비스듬한 언덕을 딛고 서있었고, 그 꼭대기층에는 북쪽을 바라보는 루프탑이 있었다. 사람들은 난간에 매달려서 때마침 해가 넘어가는 도시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우리도 그 부드러운 하늘색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은 말을 놓기 적절한 때라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고, 두 번을 만났다면 세 번 만나기는 더 쉬운 일이었다. 어플로 모르는 남자들을 만나면 어쩔 땐 절대 말을 놓기 싫을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보통 말을 놓는 건 두 번째 만남부터였다. 또 볼만한 사이가 되었을 때. 그러면 호칭도 딱딱하지 않고 친근한 어떤 것으로 대체되게 마련이었다. 그가 나를 무어라고 부를 때, 관계의 목표가 뚜렷하지는 않더라도 지향하는 방향성이 늘 그 호칭 속에 녹아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으나 나를 누나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누나...? 그렇지, 내가 4살이나 더 많았으니까,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꽤나 적합한 호칭이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로선 누나는 좀 뜻밖의 것이었다. 이십 대 때는 주로 오빠들을 만났다. 보통 남자들은 오빠라고 부르면 좋아하니까, 적어도 싫어하지는 않을 테니까, 좋아하는 오빠들은 다 오빠였다. 그것은 친근하면서도 애교 섞인 부름이어서, 심지어 싫은 사람한테는 잘 나오지도 않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오빠는 연인사이의 애칭으로도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서른 넘어서 만난 남자들은 나에게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가 나보다 한 살이 어리든 다섯 살이 어리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왜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지' 궁금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보통 여자들은 누나라고 부르면 싫어하니까, 이승기도 누나에게 너라고 불러서 매력을 어필하지 않았던가.
"그래, 누나라고 불러도 나는 좋아" 누나라고 불리기 싫어하는 수많은 누나들의 이야기를 의식하며 나는 대답했다. 친누나가 둘이나 있는 그에게 누나라는 호칭은 정말 괜찮은 건가. 나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 수도 있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세 번째 누나가 되는 건가. 아니다. 사실 그의 첫째 누나는 나와 동갑이라고 했으니까 생일만 빠르면 내가 큰누나가 되는 건지도 몰랐다.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지만 어차피 신중히 호칭을 정하더라도 부를 일 없는 사이가 되어버리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나는 그냥 그에게 누나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몇 주 동안 야경을 함께 봤던 그날을 후회했다. 나는 왜 누나라는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을까. 분명히 그날은 누나가 그렇게 거슬리는 말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쿨한 누나처럼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언어에 갇혀서 쓸데없는 자격지심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몰라서 피곤해지는 일은 이제 많이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몰랐다. 여자 친구를 지속적으로 누나라 부르는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뭐야... 나 누나 싫어하네...? 나도 그저 누나라고 불리기 싫어하는 수많은 누나들 중 한 명이었다.
나이가 많아지니 누나라고 불리는 것이 싫은 걸까. 어려 보이고 싶은 이성에게 나이 많음을 수시로 재확인해야 하니 괴로운 걸까. 누나가 돼서 동생한테 의지하기 어려울 테니까 부담스러운 것일까. 누나라 불리기 싫다면 그에게 싫은 이유도 설명을 해야 할 텐데, 나는 이제 쓸데없는 자격지심을 부리는 사람이 된 건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 누나라고 부르면 그는 내가 좋아할 거라 예상한 건가. 분위기상 연인에게 누나라는 표현은 알아서 자제해야 하는 게 아닌가. 흔쾌히 누나라고 부르라 했던 기억은 잊고, 어느새 그가 센스 없는게 아니냐고 힐난하는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 누나라는 말은 좀 안 하면 안 되겠니?" 고민 끝에 쿨하지 못함을 선언했을 때, 그는 별말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에게 호칭을 바꾸는 건 저녁 메뉴를 바꾸는 것보다 우리 관계에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그를 붙잡고 나는 누나가 왜 싫은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연하남을 만났었는데, 그가 나를 누나라고 불렀거든. 근데 그 사람 진짜 별로였단 말이야. 네가 나한테 누나라고 부르면 그 사람이 생각나서 좀 별로야." 정말 멋대가리 없고 구질구질한 변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또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너 누나 둘이나 있잖아"
나는 내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서 논리적으로 말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겉도는 얘기를 버무려서 쏟아낼 뿐, 왜 누나가 싫은 건지 정리해서 잘 전달할 자신이 없다. 그런데 그게 중요하기는 한 걸까? 싫은 걸 납득시켜야만 연인간의 호칭을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호칭은 둘이서 좋을 대로 하면 그뿐이다. 나는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데는 실패했을지라도, 쿨한 척하지 않고 기분 나쁜 호칭을 내다버리는 것에는 성공했다. 다만 그의 입에서 얼마간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누나를 저지하며 민망함을 무릅쓰고 그의 문장을 고쳐주어야 했을뿐이다..
그와는 그 뒤로 다시 그 야경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처음 말을 놓았던 그날처럼 나란히 앉아서 한강변을 바라보았다. 누나라고 부를 때는 전혀 귀엽지 않고 짜증이 나더니, 왠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가 귀여워졌다고 느꼈다. 연인에게서 귀여움은 누나 동생이 아닐 때 온다. 사실은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불러주게 될 줄은 몰랐는데, 벌써 우리에게 단골이라 부를 만한 카페가 생겼다니. 무엇보다도 누나와 동생이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