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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Dec 14. 2022

갑자기 걸려온 그 남자의 전화

제 개인정보 어떻게 아셨어요?

"여보세요? 미쓰한님 저번에 글쓰기 모임에서 번호 주고받았던 사람이에요. 저희 한번 만나서 커피 마시기로 했었잖아요."

글쓰기 모임? 번호? 커피?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깜깜한 허공을 휘저어봐도 손에 잡히는 실오라기 하나 없다. 기억 속에서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이 남자는 내 글쓰기 모임을, 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데, 나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나는 모임에서 이 남자가 방금 묘사했던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글을 쓰고 오픈된 곳에 공개를 하다 보니 일방적으로 정보가 너무 많이 노출되어버린 걸까? 나는 전화를 끊지 않으면서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녹음을 해두어야 하나? 순진하게 휘말리면 안 된다. 휴대폰 저편에서 내 대답을 촉구하는 이 남자는 왠지 모르게 빙글빙글 웃고 있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내가 모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금세 나를 끔찍한 상황에 몰아넣어 버릴지도 몰랐다. 전화 한 통에 내 상상력이 너무 과하다고? 요즘 나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좀 있었다.


그것은 몇 번의 계절을 거슬러 올라가서 올해 늦봄에 걸려온 전화에서부터 시작된다. 날씨가 꽤나 푸근해서 야외 테이블에 앉기 좋은 날이었다. 나는 데이트 중이었고, 해가 길어져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왔는데도 하늘이 여태 환했다. 우리는 와인을 글라스로 파는 곳에 들어가서 야외 데크에 자리를 잡고 와인을 한잔 마셨다. 길가에 느리게 걷는 커플들 혹은 산책을 나와 킁킁대는 개들 따위를 구경하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을 때, 갑자기 조용하던 휴대폰이 울려왔다. 일요일 저녁 데이트 중이었으니 모르는 번호였다면 받지 않았을 텐데, 화면에는 뜻밖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현욱’. 그것은 궁금증을 유발할만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나는 전화를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전화를 한 거야?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안 본지는 아마 2년은 더 된 거 같은데. 그리고 우리는 친하지도 않았잖아?


이현욱은 내가 '자아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의 소셜 모임을 가입했을 때 처음 만났다. 멤버는 11명이었고, 직업은 대학생부터 평범한 직장인, 세무사, 쇼핑몰 대표까지 다양했다. 이현욱의 첫인상은 자유분방한 패션업계의 인플루언서 같은 느낌이었다. 와이드 팬츠에 박시한 스투시 티셔츠를 입었고, 팔뚝에는 그라피티 예술가 뱅크시의 그림이 타투로 새겨져 있었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살을 드러내며 타투가 두 개나 더 있다고 자랑을 했었다.) 쌍꺼풀이 없는 눈에 귀여운 외모를 가진 그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꽤 많을 것 같은 인상이기도 했다. 우리는 각자 첫인상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세 달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의 직업과 나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그 소셜 모임의 규칙이었다. 나이와 직업은 마지막에 공개할 것. 모임은 2주에 한번 있었고 6번째이자 마지막 모임에서 우리는 나이와 직업을 공개했다.


모임의 특성상 우리는 빠르게 '우리'라는 결속감을 가졌다. 자아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는 자리는 흔치 않았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모이는 날이 굉장히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와 친했던 걸까? 사실 단시간에 많이 가까워졌다고는 하지만, 당연히 11명 모두와 편할 수는 없었고, 특히 나는 그가 섞이기 어려운 부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패션업계의 인플루언서라니. 그는 마지막 날 본인의 직업을 사업가라고 설명했다. 뒤풀이 자리에서도 홍콩에서 온 바이어와 늦은 밤 미팅이 있다며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는 하얀색 쿠페형 독일차를 타고 왔고, 전반적으로 젊고 유능하고 부유한 사업가처럼 보였으며,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나는 6번의 정기 모임 뒤로 한 번도 그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11명 중에 친하게 지냈던 4명과 몇 번 얼굴을 봤을 뿐. 그리고 그때 그가 쇼핑몰을 하던 여자 멤버와 결국 사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것이 그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그런데 2년 만에 전화를 한 것이다. 뜻밖의 전화를 받자, 그는 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누나, 잘 지내시죠? 갑자기 연락드려서 너무 죄송한데.. 제가 내일 바로 갚을 수 있는데, 지금 백만 원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주말이라서 융통이 안돼서 그래요. 진짜 내일 은행 영업시간 되면 바로 보내드릴게요"

나는 당연히 거절을 했다. 만원, 아니 오만 원도 아니고 무슨 백만 원을 나한테 빌려? 아마도 주변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모든 인맥을 이미 총동원했고, 다시 전화번호 목록을 훑어보다가 나에게까지 연락을 하게 된 것이겠지. 그렇다면 보나 마나 내일까지 갚겠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인 게 분명했다. 나는 '자아 탐구' 소셜 모임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4명에게 연락을 돌려서 혹시나 이현우에게 연락이 오면 받지 말라는 당부를 전했다. 그리고 그 달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루나 코인의 몰락과 여타 위험성 있는 코인에 대해 방영됐다. 돈을 잃은 젊은이들이 많았고,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난달이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쓰느라 집중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최근 글을 기고하고 연재하는 곳이 생겨서 혹시 그쪽에서 온 연락이 아닐까 싶어 전화를 받았다.

"미쓰한씨 되시죠?"

"네, 맞는데요."

"이현욱 씨 아시죠?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네? 그, 그냥 소셜 모임에서 몇 번 본 사람인데요? 저 그 사람 안 본 지 2년이 넘었어요. 무슨 일이세요?"

"여기 대부업체구요. 그 사람이 돈을 빌려가서 안 갚고는, 미쓰한씨 개인정보를 담보로 걸었어요."

휴대폰 저편에서 무서운 단어들이 여러 개나 들려왔다. 나는 겁을 집어먹었고,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대부업체라는 그 남자는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이현욱에게 당장 연락해서 항의를 하라고 했다. 나는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말이 안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개인정보를 담보로 걸었다니? 이현욱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개인정보라는 것은 특별할 것이 없는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대부업체가 스스로를 대부업체라고 지칭하는 것도 이상했다. 보통 'OOO캐피털'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던가? 어쨌든 나는 금융권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전화해 자문을 구했고, 그 친구 역시 허무맹랑한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대답을 했다. 아마 심부름센터 같은 곳에서 떼인 돈을 받아주기 위해 여기저기 이현욱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있는 게 아니겠냐는 것이 우리의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글쓰기 모임에서 번호를 교환했고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는 그 남자는 누구였냐구? 내가 계속 대답을 안 하자, 상대는 제발 차단하지 말아 달라고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미쓰한~ 나야 나, 글쓰기 모임 매니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들어 보니 매니저 목소리가 맞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장난전화를 하는 거야..? 대부업체니, 담보니 하는 무서운 말들을 모르는 전화로 받아봤다면, 단순한 장난에도 급격히 쫄려오는 마음은 누구나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요즘 보이스피싱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다. 나는 릴랙스하고 매니저에게 이현욱이라는 젊은 채무자에 대해 설명을 했다. 내가 왜 이토록 쫄아서 아무 대꾸 없이 얼어있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약속했다. 이번 글쓰기 모임에서 이것을 아무래도 적어봐야겠노라고.


*글에 나온 인물과 모임의 이름은 이해를 돕기 위한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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