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확장
유행병 없던 시절에 받았던 마라톤 티셔츠를 대충 필라테스 복으로 입는다. 어차피 둘 다 운동용이니까. 러닝화를 신고 현관에서부터 냅다 달리는 대신, 양말도 얌전히 벗어놓고 매트 위에서 중심을 잡는다. 물론 중심을 잡다가 무너지면 나도 모르게 냅다 뛰어나가는 경우도 있다. 120 bpm이상으로 엄선한 러닝 메들리는 사라지고, 선생님의 숫자 세는 목소리만 스타카토로 들려온다. 그리고 그 단호한 카운팅은 어쩐지 점점 더 느리게 느껴진다. 빠를수록 힘들었던 동작에서 느릴수록 고통스러운 동작으로 운동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렇게 정적인 운동을 내가 시작하게 될 줄이야… 몸이 망가지면서 운동 취향을 고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달리기나 사이클처럼 숨이 찬 운동을 즐겨하다가, 골반이 틀어지고 통증이 생긴 뒤로는 체형교정을 위해 필라테스를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필라테스 요정들을 본 적이 있는가? 매끈한 팔다리가 침대를 개조한 요상한 기구 위를 날아다니는 사진들 말이다. 나는 첫날부터 알았다. 내가 거울 속에서 그런 걸 보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가뿐히 떠오르는 나비 같은 필라테스 요정은 어디에도 없고, 흡사 고문을 당하는 대역 죄인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 악물고 버틸 때까지 버티다 보면 몸은 다소 흉하게 부들부들 떨리고, 끙-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학원 측의 계획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그룹의 다른 3명 모두 요정보다는 죄인에 가깝다. 주변 시야로 보이는 우리 회원님들은 언제나 나에게 위안이 된다. 나도 그들에게 그런 존재겠지? 우리 존재 화이팅…
우리 존재 때문에 갑갑해진 선생님의 설명은 언제나 더 길고 구체적이 된다. 다리를 들어 올리거나 상체를 숙이는 것처럼 큰 동작들은 별로 집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견갑골을 펴고 흉추를 밀어낸다거나, 꼬리뼈를 말아내고 무릎을 외회전 하라는 동시다발적인 설명을 따르는 건 큰 집중력이 필요하다. 처음엔 ‘견갑골? 그게 어딘데? 외회전?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하고 감을 못 잡다가, 선생님의 쉬운 설명이 이어지면 최대한 그런 느낌이 나도록(?) 노력을 해본다. 문제는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여러 부분에 동시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워서 혹은 가만히 서서 이렇게 정신이 바쁘다는 것은 놀랍다. 이것이 정적인 운동의 진정한 묘미인 걸까. 몸에 집중하기 때문에 정신수양까지 된다는 운동 수행 말이다.
오늘도 잠든 몸을 깨워서 필라테스에 다녀왔다. 운동 한 시간 전쯤에 일어나서 2018년도 마라톤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아침부터 온 메시지들을 확인하다가 수업에 조금 늦었다. 급하게 들어간 수업에서도 대학교 동기가 결혼한다고 오래간만에 보낸 그 메시지를 떠올려본다. 걔가 나보다 빨리 갈 줄 몰랐는데. 이럴 수가. 웨딩드레스가 무척 아름답고 남편이 아주 훤칠한 훈남이었다. 둘 다 어디서 구한 거지? 생각이 이어질 때 선생님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허리가 뜨지 않게, 다시 반대로!!” 상념은 끊겨버렸다. 부러움의 상념에게 나눠줄 집중력이란 없다. 달릴 때는 주로 반복적으로 다리를 교차하며 잡념을 떠올렸다. 그러면 나는 의식적으로 그 속에서 귀한 글감을 끄집어내려는 노력을 했는데, 필라테스는 아예 잡념 자체를 사그라들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예전엔 취향을 확인하는 것이 기뻤다. 심지어 신라면보다 진라면을, 등심보단 안심을, 라거보다는 아이피에이를 선호한다고 뚜렷하게 말하면, 흐릿했던 내 색깔이 뚜렷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취향을 확장하는 것의 즐거움을 조금씩 알 것 같다. 산 낙지를 서른에 처음 먹어보고 이제까지 좋아하는 일처럼 말이다. 점점 매력적인걸 보니 필라테스도 내 색깔을 조금 더 다채롭게 만들어줄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취향의 완성이라는 것은 없지 않을까? 무지의 확신만이 있을 뿐, 알고 보면 이것 참 내 취향이었구나 하게 되는 것들이 이세상에 아주 많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