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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한 Mar 24. 2024

경기도 나트랑시, 충청도 달랏시

베트남여행에서 느낀 대한민국

카이강의 남쪽으로 어지럽게 놓여있는 좁은 도로들을 따라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달리고 있었다. 길 위의 보행자를 봐도 오토바이들은 멈추는 법이 없이 시냇물 속의 물고기 떼처럼 그들을 부드럽게 피해 지나갔다. 해변의 푸른 물결은 갓 지은 듯 보이는 뽀얀 침향탑과 줄지어선 야자수를 향해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국의 땅 베트남에 온 것이다. 나트랑은 첫 방문이지만, 벌써 내 여권에는 베트남 이민국의 도장이 다섯 번이나 찍혀있었다. 이 정도면 베트남을 꽤 좋아하는 여행자가 아닌가. 그러나 이번 여행은 베트남을 보려고 떠나온 여행인데도 결국 더 많이 보고 느꼈던 것은 한국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직항이 있는 웬만한 여행지들은 한국인이 지배를 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은데, 패키지가 저렴한 동남아는 오죽하겠는가. 그간 시험준비가 바빠서 여행준비를 할 시간이 없어 이번엔 가족여행을 패키지로 선택했는데, 예상대로 진짜 경기도 나트랑시, 충청도 달랏시를 느끼고 왔다.


우리의 투어는 커다랗고 하얀 관광버스에 오르며 시작되었다. 오밤중에 도착한 깜란 공항에는 한국말로 안내문구를 적은 여러 대의 버스가 있었는데, 캐리어를 끄는 한국사람을 아무나 쫓아가다가 우리 엄마는 다른 투어버스에 올라탈뻔하기도 했다. 그 여러 대의 관광버스들은 우리와 비슷한 루트를 돌면서, 힌두교 사원이나 베트남 재래시장 같은 곳에 우리와 같은 한국사람들을 쏟아냈다. 사원이나 재래시장의 규모는 내 알바가 아니라는 듯, 한국사람들을 쏟아내고 또 쏟아냈다. 나트랑을 떠나 달랏에 도착해도 모양새는 비슷했다. 어딜 가나 들려오는 한국어 덕분에 흡사 경주 근처에 와 있는 것 같았지만, 분명히 그곳은 베트남이라서 언니가 들고 온 국내용 와이파이 에그는 절대 터지지 않았다. (국내용 에그를 빌려온 웬수같은 언니덕에 여행 내내 인터넷 디톡스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이 넘쳐나는 관광지가 아주 불만스러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재밌는 경험이었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그토록 많은 한국관광객들을 만나는 것이 아주 진귀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달랏은 사계절 내내 봄날씨를 유지하는 아름다운 도시다.

가이드가 작은 프랑스 마을이라고 소개했던 달랏은 이제 프랑스보다도 한국을 더 많이 품고 있는 듯했다. 해발고도가 2천 미터가 넘는 고원에 비닐하우스 재배방식을 도입하고, 도시전체를 아름다운 화훼도시로 발전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한국의 김진국 교수라고 했다. 한밤중에 고지대에서 내려다본 달랏의 풍경은 그야말로 황금의 도시였다. 비닐하우스마다 환하게 켜진 노오란 불빛은 달랏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달랏대학교에는 베트남 최초로 한국어학과가 생겼다고도 했다. 한국에 한 번도 와본 적 없다는 현지인 가이드는 완벽한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냈다. 이런저런 역사를 생각하면서 나는 그것들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우리말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것은 그 어떤 멋진 환영인사 하나 없이도 열렬히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비닐하우스 불빛이 보이는 달랏의 야경

베트남에서 느낀 또 한 가지의 한국의 모습은 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 내용 자체는 당혹스러울 것이 없지만, 내가 베트남에 와서까지..?라는 생각 때문이랄까. 우리 패키지 투어의 인원은 총 23명이었다. 그중에 대부분은 우리 부모님과 나이대가 비슷한 분들이었고, 부모님을 모시고 온 딸들이 몇 명 더 있었다.( 다들 아들은 키워봤자 소용없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젊은 사람들끼리는 패키지여행을 잘 오지 않으니 이것은 당연한 나이분포였다. 3박 5일을 여행하는 초반에 우리 가족은 다른 여행객들과 눈인사만 건네며 별다른 대화가 없었는데, 여행 후반으로 갈수록 체력이 고갈된 사람들은 자유시간에 모여 앉아 관광보다는 잡담을 했다. 그중에 얄미운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다. 그 아주머니는 우리 엄마에게 몇 살이냐고 나이를 물었는데 엄마가 대답을 해주고 그 아주머니의 나이를 되묻자, ‘나는 내 나이 잊고 살아요~’라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언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결혼은 했는지, 왜 안 했는지, 부모님과 같이 사는지, 빚쟁이처럼 물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엄마랑 같이 사는 게 좋다고 하자, 그것은 엄마를 괴롭히는 것이라며 빨리 결혼하는 것이 효도라고 잔소리를 했다. 결혼 안 한 딸들은 효도여행을 와서도 불효녀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아주머니, 본인도 장가 안 간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잔소리는 본인 아들한테나 할 것이지…), 곧 서울에 집 사줘서 내보내려고 한다고 마지막으로 자가소유 자랑까지 하고 떠났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얄밉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나니, 함께 여행하던 아주머니들이 하나같이 고해성사하듯 장가 안 간 아들의 존재를 공유했다. 어떤 아주머니는 자기 아들 나이를 말하며 우리 엄마에게 내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었다고 했다. “우리 딸이 세 살 더 많네요”하고 엄마가 대답하자, “요즘은 그 정도 나이차이 괜찮지~”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던 아주머니가 “세 살은 차이가 너무 많네” 그러더니 이어서 하는 말, “우리 아들은 두 살 어린데.. 어떻게 주선 한번..^^?” 쌀국수에 올라간 고수잎보다도 가벼운 혼사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한국에 있던 그 아주머니들의 아들들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 대한민국 뉴스에서도 흔히 접하고 우리 집에서도 일어나는 사실이지만, 결혼 안 한 3,40대의 딸아들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베트남에서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될 줄이야. 우리 패키지투어 멤버에는 초등학생 아들과 부모님을 모시고 온 젊은 엄마도 있었는데, 그 부모님은 그 젊은 엄마에게 둘째를 낳으라고 연신 설득을 하고 있었다. 젊은 엄마는 이제 본인은 늙었고, 하나 더 낳아 기르는 것은 두렵다고 손사래를 쳤다. 결혼만 하면 효도라더니, 이 집은 아이 하나를 낳고 또 둘째까지 나아야 효도인 걸까? 하긴 출산은 이제 효도를 넘어 애국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전쟁 중인 국가의 출산율보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더 낮다고 하니까 말이다. 한국사람이 모인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한국사람들의 고민도 함께 모여있었다.


그러나 되려 우리 부모님은 우리의 결혼 유무에 무던하다. 그 속은 얼마나 시끄러운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에겐 그리 내색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캥거루족으로 사는 것이 마냥 행복하냐면 그렇지는 않다. 나도 세상이 정해놓은 평범한 궤도를 따르지 못하고 겉도는 것에 대해 부모님께 송구한 마음이 있다. 나는 내 멋대로 사는 것이 행복한데, 부모님은 평범한 자식을 둔 본인의 친구들이 몹시 부러우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특히 엄마 아빠의 작고 굽은 어깨를 보면 마음이 더 그렇다. 부모님은 코로나 이후 첫 해외여행이라 오래간만에 많은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사진 속 모습이 수년 전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엄마아빠가 점점 더 쪼그라들고 있구나. 금방이라도 사라질까 봐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엄마아빠가 금세 또 쪼그라들어서 더 애잔해지기 전에 내가 결혼이나 출산 같은 것을 할 수나 있을까? 내가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함께 여행 다니는 것뿐이다. 세계 곳곳에서 만난 한국 아주머니들이 결혼 못한 불효녀라고 핀잔을 주더라도 말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식탁에서 아빠는 패키지 여행보다 내가 계획한 미쓰한투어가 더 좋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야 패키지여행도 좋은 점이 많다~’하고 여행소감을 마무리했다. 어떤 여행이 되었든 간에 건강할 때 많이 놀러다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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