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닐리아에서 마나롤라까지 트레킹
밀라노를 출발한 트렌이탈리아가 코르닐리아에 도착하자, 언니가 먼저 거대한 여행용 가방을 기차 출입문 계단으로 옮겼다. 언니는 이내 가방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승강장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우리는 친퀘테레에 도착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북서부에 위치한 친퀘테레(Cinque Terre)는 다섯 개(Cinque)의 마을(Terre)이라는 뜻을 가진 소도시이다. 해안 철도로 이어진 다섯 개의 마을은 모두 티레니아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르닐리아역에 도착해서 우리는 제일 먼저 여행기간에 맞는 친퀘테레 패스를 구매했다. 4일간 우리는 패스를 가지고 다섯 개 마을을 오가는 기차와 마을버스를 자유롭게 탈 수 있을 것이다.
친퀘테레의 다섯 마을은 몬테로소, 베르나차, 코르닐리아, 마나롤라, 리오마지오레이고 이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차례대로 줄지어 서있다. 숙소를 정할 때 코르닐리아가 가장 중앙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숙소를 정하기 적합한 곳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동하기 편리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곳은 가장 이동하기 불편한 마을이었다.
다른 마을들은 모두 기차역에 내려서부터 마을이 시작되는데 반해 코르닐리아는 기차역에서 마을버스를 타야지만 마을 중앙으로 갈 수 있었다. 그나마도 마을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몰리면 어쩔 수 없이 마을 중앙까지 걷는 것을 택해야 했다. 숙소가 불편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이동에 체력소모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것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가 어쩐지 마음이 금세 바뀌었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친퀘테레에 가야겠다고 언니를 설득했던 이유는 유럽의 작은 마을에 가고 싶어서였다. 3층 정도 높이에만 올라도 동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그런 작은 마을. 꼭 봐야 한다거나 꼭 해야 하는 것이 따로 없어서 여행자들의 발걸음에 서두르는 기색이 조금도 없는 그런 작은 마을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마을 중 가장 작은 코르닐리아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장소가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코르닐리아는 다섯 마을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마을이었다. 가장 작은 마을인 그곳은 해변 마을인 나머지 마을들과 달리 산비탈을 끼고서 절벽 위에 올라앉아있었다. 왠지 날 위해 공들여 만든 맞춤구두를 선물 받은 기분으로 숙소에 들어갔다. 우리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창문을 열면 파스텔톤 건물들 옆으로 시원한 바다가 펼쳐져 보였다. 절벽 아래로 레몬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들을 보면서 나 역시 낭만적인 이 작은 마을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들었다.
기차만 타고 마을을 오가는 많은 관광객과는 다르게, 내가 친퀘테레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트레킹이었다. 첫날 친퀘테레 패스를 사면서 받은 지도를 펼쳤다. 지도에는 해안선 트레킹 코스가 파란선으로 산등선 트레킹 코스가 빨간 선으로 표시되어있었다. 언제나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바라보는 것을 선호하는 나는 빨간색 코스로 트레킹을 하자고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는 늘 내 여행 계획에 큰 불만이 없는 사람이므로 우리는 산하나를 넘어서 코르닐리아에서 마나롤라까지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트레킹에 앞서 우리는 숙소 아래에 있는 마을 내 유일한 식료품점에 갔다. 풍채가 좋은 아주머니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아침인사를 했다. 도넛처럼 생긴 납작 복숭아와 크래커, 바질 페스토를 샀고 언니가 좋아하는 브릭 치즈도 골랐다. 주인아주머니는 이미 세모나게 한 조각이 사라진 커다란 치즈 덩어리에서 우리 몫만큼을 잘라 기름종이에 곱게 싸주셨다.
나는 엄홍길처럼 지도를 들고 앞장을 섰다. 언니와 여행할 때 길을 찾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고, 나는 지도 속에 있는 것들이 실제 하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이유 없이 놀랍고 즐거웠다.
그런데 지도 위에 그려진 빨간 선의 시작 지점은 너무나 불분명했다. 왠지 시작점은 기차역 앞에서 있을 거라는 예상 때문에, 우리는 무작정 기차역까지 걸어갔다. 친퀘테레의 7월은 무더웠고 마을에서 역까지는 15분이 넘게 걸렸다. 기차역에서도 트레킹 시작 지점을 찾지 못해서 나는 역무원에게 길을 물었고 그녀는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는 이정표가 나올 때까지 되돌아가다 보니 트레킹의 시작 지점은 우리가 다녀간 식료품점 바로 옆이었다. 맥 빠지는 일이었다. 길을 잘못 찾아서 체력소모를 한껏 한 후에야 우리의 트레킹은 시작되었다.
산등선까지 오르는 길은 꽤 가파른 곳이 많아서 숨이 차고 힘들었다. 하지만 산등선에 오르고 나니 더 이상의 가파른 오르막길은 없었다. 우리는 바위에 걸터앉아 크래커에 브릭 치즈와 바질 패스토를 올려서 먹었다.
산등선을 따라 걷는 트레킹은 그냥 산책과 비슷해서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고 떠들며 걸을 수 있었다. 평지 코스라서 숨이 차지 않는 대신 몇몇 길들은 불친절하게도 너무 좁았다. 그 좁은 길의 주변은 온통 가파른 계단식 포도밭이었다. 반대편에서 사람이 오면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는 작은 공간만이 가끔씩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일 년에 열명쯤은 발을 헛디뎌 포도밭을 나뒹구는 일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직선코스 하나가 끝나자 높은 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과 교회가 보였다. 교회 앞에 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땀 흘리는 우리 얼굴을 보고 교회 뒤편을 가리키셨다. ‘워터, 워터’ 그곳에는 식수대가 있었다. 친절한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물을 마시며 교회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난생처음 보는 키위나무가 있었다. 마트에서 포장된 키위만 보다가 주렁주렁 매달린 키워 나무를 보니 너무나 생소하고 신기했다.
우리는 두 시간 반 만에 코르닐리아에서 마나롤라에 도착했다. 언니는 그제야 진짜 올라오기 싫었다는 속마음을 얘기했다. 평소에 등산을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언니는 체력이 부족해서 오르는 코스 내내 말이 없었다. 언니는 말이 없던 그 시간 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작 지점을 찾아 헤매면서부터 언니는 힘이 들었고 오르막길에서는 포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도 올라오길 너무 잘한 것 같다며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산행을 하며 괜히 올라왔다고 말하는 사람을 살면서 본 적이 없다. 트레킹을 함께 잘 끝내준 언니의 체력에 고마울 뿐이다.
여행은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지만, 그것을 예상치 못한 실망으로 만들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즐거움으로 만들지는 순전히 나에게 달려있다. 여행에도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마음가짐은 다 체력에서 온다. 여행이고 뭐고 체력이 바닥나면서부터는 다 끝장이다. 불평불만은 바닥난 체력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좋은 곳에서 항상 즐거운 마음을 가지려는 준비, 체력관리 역시도 여행 준비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