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히메)"의 남자 주인공이 "아시타카"다.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라서 작품의 스토리는 따로 소개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4~5년 전쯤에 대학교 기숙사 침대에 누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던 때였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여러 번 은퇴를 번복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의 은퇴 선언이 화젯거리도 아니지만 그가 처음 은퇴작이라고 밝혔던 작품이 원령공주였다. 내가 보았던 그 다큐멘터리는 아마 그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했던 영상일지도 모르겠다.
다큐멘터리의 어느 한 장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한 직원이 그린 작화를 보며 연출 방식을 감독하던 중이었다. 젊은 애니메이터가 그렸던 장면은 주인공 아시타카가 험준한 숲 속 골짜기 아래로 달려가는 순간이었다. 골짜기로 내려가는 경사도 급하거니와 정식으로 난 길이 아니었기에 나무 가지와 억센 숲 덤불이 아시타카의 앞을 가로막았고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애니메이터는 아시타카가 아래로 내려가는 와 중에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양 팔로 얼굴을 보호하는 모습으로 장면을 연출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장면을 두고 이건 아니라며 지적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터에게 대략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아시타카라면 이 장면에서 이런 식으로 뒤로 움츠러들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나무 가지와 숲 덤불을 양팔로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을 거야. 아시타카라면 말이야.
다큐멘터리는 애니메이터가 처음 그렸던 장면과 미야자키 감독의 의견을 반영한 수정된 장면을 비교해서 보여주었다. 위험한 순간에 잔뜩 움츠린 아시타카와 방해물에 개의치 않고 맹렬히 앞으로 전진하는 아시타카. 완전히 다른 주인공의 두 모습이 번갈아 다큐멘터리 화면에 등장했다.
다큐멘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독으로서 뛰어난 역량, 아니면 얼마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지 보여주려고 했을지 모르지만 아무 생각 없이 다큐멘터리 내용을 따라가던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시타카라면 달랐을 것이라는 미야자키 감독의 말은 나에게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고 마치 이렇게 물어보는 듯했다.
"너도 아시타카처럼 살지는 않았지?"
크고 작은 인생의 위기는 우리가 죽어서 흙이 될 때까지 언제 어디에서나 찾아올 수 있고, 그럴 때 두려워서 회피한다고 해서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나약한 인간들이고 그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때도, 아시타카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미야자키 감독의 말은 숙연한 마음을 들게 했다.
그날 본 다큐멘터리는 제목도 기억나지 않고 유튜브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다. 나는 아시타카처럼 살지 못했지만 적어도 아시타카와 같이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주 가끔은 아시타카 흉내를 내볼까 하는 작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