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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걱정 많은 아저씨 Mar 04. 2024

코무덤(귀무덤) 비(이)총

임진왜란~정유재란(1592~1598)_네 번째, 이총(비총) (3)

 교토를 여행하며, 직접적인 조선침략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코무덤(귀무덤) _ 현재 일본 교토의 정식명칭 이(비)총 _ 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기 위한 자료들을 정리 중인데, 세번째까지는 왜란을 중심으로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관련 자료들을 정리했다면,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코무덤(귀무덤)에 관련된 내용들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임진왜란 관련 사건들을 시간대로 정리했던것을 코무덤(귀무덤) 중심의 세세한 사건들까지 정리하여 시간대로 재나열해 보자.


1586 : 1차 호코지 건립 시작 _ 도요토미 히데요시 스스로.

1589 : 7월 9일 _ 요도도노의 장남 _ 첫째 아들 츠루마츠 출생

1590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전국을 통일

1591 : 9월 22일(음력 8월 5일) 츠루마츠 사망

          12월 28일 도요토미 히데츠구,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취임.

1592(선조 25) : 3월 임진왜란 발발 (일본의 1차 조선침략), 3월 26일 히데요시 나고야로 이동

                      8월 29일 오만도코로(히데요시 모친) 사망

                      7월 명군의 임진왜란 참전

1593 : 8월 29일 _ 요도도노의 두 번째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 출생

1594 : 대지진으로 인해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호코지의 대불(18m)이 부서짐.

1595 : 1차 호코지 완성 (공사기간 10년)

          7월 15일 히데츠(쓰) 구 폐위 후 할복

1596 : 1차 호코지 멸실, 지진으로 붕괴(완성 후 1년 만에 붕괴).

1597 : 2월 21일 정유재란( ~ 1598)

          8월 16일 귀(코)무덤 완성 후, 히데요시와 상국사의 승려 사이쇼 쇼타이(西笑承兌) 면담.

          9월 16일 명량대첩

          9월 28일 히데요시, 봉분위에 오륜탑을 세우고, 귀무덤에 대한 시아귀 회법요(施餓鬼會法要)를 명함.

1598 :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_ 네네 출가 ('고다이인'으로 불림, 교토 '고다이지'로 이동)

          11월 18일~19일 _ 노량해전 왜군 일본으로 퇴각, 폐퇴. 이순신 장군님 전사

1599 :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호코지 인근, 아미다 산정에 매장 후, 도요쿠니 신사 창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유로 도요토미 히데요리, 1차 호코지 재건 시작, 하지만 화재로 멸실.

1600 : 세키가하라 전투 _ 고니시 유키나카,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엔케이 (서군의 패배로 처형)

1603 : 03월 24일 _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이이타이 다이쇼군 취임, 에도막부시대 시작

1604 : 08월 _ 조선 정부의 송운(사명)대사_유정 파견(직접적인 대일교섭 시작).

          12월 _ 송운대사 일행 교토 도착

1605 : 03월 _ 송운대사 도쿠가와 이에야스 회담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을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줌(도쿠가와가 2대 쇼군).

1607 : 선조 40 _ 조선 '회답겸쇄환사' 일본 방문 (해사록, 경섬) _ 전 후 첫번째

1608 : 2차 호코지 재건 시작(구리로 만든 18m 높이의 몸체에 금박을 입힌 대불과 50m 높이의 대불전).

1614 : 04월 19일 _ 2차 호코지 재건완료(범종 완성).

          11월~12월 _ 오사카성 1차(겨울) 전투 결과 : 오사카성 외곽해자 해체.

           10월 호코지의 범종에 새겨진 '국가안강 군신풍락'의 해석을 하나는 이에야스의 이름 家康을 安자로            잘라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臣과 豊을 이어놓아 도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고 도쿠가와 가문에 대            해 저주를 거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7월 대불공양을 연기하게 했다.(고잔의 승려와 '하야시 라잔'이 종            명문을 해독) 8월~10월까지 외교적인 소통이 있었지만, 끝내 오사카 전투가 발발한다.

1615 : 04월~05월 _ 오사카성 2차(여름) 전투 결과 : 도요토미 히데요리(히데요시 일가) 멸망.

            (도요쿠니신사 및 무덤도 이때쯤(혹은 이후) 파괴됐던것으로 추측됨).

1616 : 6월 01일(음력 04월 17일) _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망

1617 : 광해 9 _ 조선 '회답겸쇄환사' 일본 방문 (부상록, 이경직) _ 전 후 2번째

1623 : 도쿠가와 히데타다, 쇼군 지위를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물려줌.

1624~25 : 인조 2 _ 조선통신사 일본 방문 (동사록, 강홍중) _ 전 후 3번째

               10월 17일 '네네' 사망 (기타노만도코로: 무로마치 시대부터 관백의 정실을 칭하는 이름)

1662 : 대지진으로 호코지 대불전과 대불 붕괴(2차 멸실, 하지만 곧바로 복원?).

1748 : 조선통신사의 교토 이총방문, '조선인래조물어(朝鮮人來朝物語)',

          '조선통신사이총견물회도((朝鮮通 信使耳塚見物繪圖)'.

1799(8?) : 낙뢰로 호코지 소실, 동종만 남게됨.

1868 : 메이지유신 개시

1869 : 5월 동경 천도 _ 일왕이 동경의 '도케이성'을 '황성'으로 바꾸어 들어감

1880 : 메이지 정부 _ 도요쿠니 신사 재건,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장.

1889 : 메이지유신 종료

1898 : 일본의 제국주의화의 분위기 속에 히데요시를 재평가하고, 대규모 개수를 진행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재평가함으로써 관련 유적으로 '조선인이총'을 국위 위신의 증표로 여김.

1915 : 관리가 잘 안되던 조선인이총을 '우익 인사 _ 오바타 이와지로'가 돌울타리로 둘러치고 정비함.

1968 : 04월 12일 _ 귀무덤(이총), '호코지(方広寺) 석루(石塁) 및 석탑(石塔)'으로서 국가사적으로 지정.

1979 : 교토 조선인 이총, 안내문 설치  

1990 : 부산 자비사의 박삼중 스님, 코무덤 유토를 국내로 봉환

1993 : 경남 사천시의 조명군총 옆에 귀무덤(코무덤) 안장

2003 : 교토의 '이총'을 '이총(비총)'으로 병기 하는것으로 안내문 변경

2022 : 경남 사천시 조명군총의 귀무덤 위령비를 '코무덤'으로 변경


위 사건들의 시간대별 흐름을 바탕으로 지난번 글에서 던졌던 질문들에 답을 달아 보았다.


1. 코무덤을 귀무덤으로 바꾼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 당신은 누구세요?

 하야시 라잔:  조선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인 '강항'과 교류하고 영향을 받은 '후지와라 세이카'가 '하야시 라잔'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천거했다. 전후 조선 정부의 외교관으로 교토에 방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대면한 송운대사도 총명함을 칭찬한 '하야시 라잔'은 가도쿠가와가의 선생으로 일하게 된다.

1607년 :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스승이 되며, 이후 막부정치에도 관계하게 되며, 도쿠가와 막부의 학문을 책임지게된다.


2. 코무덤은 '코'무덤인가? '귀'무덤인가?

당시 남원성에서 희생된 수많은 조선인과 명나라 군사들은 왜군들이 휘두른 칼에 목과 귀 코가 잘렸다. 당시 왜군 중에는 코 수집관인 '군목부'가 파견되어 병사들이 베어 온 코를 모아 소금 석회 등으로 방부 처리한 다음 자루나 통발에 담아 일본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

임진 전쟁 때에는 귀를 잘랐으나 정유전쟁 때는 코를 잘랐다. 한 사람을 죽이고 두 사람으로 계산해서 전공을 쌓으려는 것을 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나뿐인 코를 자르도록 명령했다. 임진·정유 두 왜란 상황을 가장 잘 알고 기록한 자는 오카와우치 히데모토이다. 당시 그가 쓴 <조선물어>를 보면 조선인 18만5738명, 중국 명나라군 2만9014명으로 총 합계 21만4752명이 된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02904

=> 기타 다양한 자료들을 종합해 생각해 보면, 민간인 피해가 극대화 된 정유재란때 이러한 수급이 많이 모였을 것이며, 주로 코가 묻혀있을것으로 생각되지만, 조선인들의 머리와 귀 등도 함께 묻혀있을것으로 추측되며, 이미 420년도 넘게 지났으므로, 아무리 소금, 식초, 석회로 방부처리를 했더라도 현재는 흙으로 모두 돌아갔으리라...


3. 오 층 석탑은 위령의 의미인가? 제압의 의미인가?

 '1624년에 조선은 에도 막부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쇼군 세습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사신들은 에도를 다녀오는 길에 교토에 머물렀는데 1625년 1월 17일에 대불사를 찾았다. 부사 강홍중(1577-1642)의 『동사록』을 읽어보자.  

“1625년 1월 17일

맑음. 사시(巳時)에 출발하여 시가지를 지나 대불사(大佛寺)를 찾아가니, 대불사는 왜경의 동남방에 있었다. 현방과 더불어 두루 보니 금부처 하나가 당중(堂中)에 있는데, 그 높이는 10여 장(丈)이요, 그 둘레는 한 산더미와 같았다. 층탑(層榻)과 사벽(四壁)은 모두 황금으로 칠했으며, 건물은 크고 헌걸스러워 기둥의 크기가 세 아름이었다. 바닥에는 큰 돌을 깔았는데 깎고 갈아서 매끄러웠으니, 그 제도의 장려(壯麗)함이 천하에 둘도 없는 거찰(巨刹)이었다.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중수한 지 겨우 20여 년이 된다 한다.

 대불사 절 앞에 봉분(封墳)과 같은 높은 언덕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 석탑이 세워졌다. 왜인들이, “수길이 조선 사람의 귀와 코를 모아 이곳에 묻었는데, 수길이 죽은 후에 수뢰(秀賴)가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하며, 어떤 사람은, “진주성이 함락한 후에 그 수급(首級)을 이곳에 묻었다.” 하니, 들으매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후략)”'

-> 전후 세번째, 회답겸쇄환사 방문시에 귀무덤에 대한 언급이다. 이후 통신사들의 비슷한 언급이 있었고, 1719년 정사 홍치중이 이끈 통신사의 제술관 '신유한'은 호코지 대불 앞에서 연회가 열리는것에 불쾌함을 표하기도 했고, 이후 통신사의 방문때는 귀무덤 주위에 발을 쳐서 가리고도 했다고 하는데, 위령의 의미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개인적으로 '그런 의도가 있었으면 했지만...'헛된 기대였던것 같다는 결론을 냈다.

  송운대사께서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에서 말씀하신것 처럼, '통화의 여부는 오로지 일본이 성실한가 아닌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긴 시간동안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큰 노력이 필요하거늘, 통신사를 받아들이는 지역 사람들의 행동까지 지침을 내려 관리했던 에도막부가, 귀무덤을 가리는 정도의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는것에서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인 코를 전리품으로 내보이고 다닌것을 떠나서, 조선인들의 거부 반응이 있었음에도 도쿠가와 막부는 큰 개선을 하지 않았다.

 그 진심과 성실함이 애초에 없었거나, 있었어도 턱없이 부족했다고 판단된다. 또한, 억울함 죽음을 당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나 그네들이나 무덤의 위에 탑을 올려서 고인의 넋을 기리는 방법은 찾아보기 어려운만큼, 뚜렷히 해석되지 않는 이 석연찮은 모습 또한 긍정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4. 코무덤을 중심으로 한 호코지, 도요쿠니 신사, 코무덤 관련 시간대 나열.

 -> 첫번째 임진왜란 포스팅에서 본 포스팅에 추가한 년도별 중요사건들은 녹색으로, 수정한것은

     붉은색으로 표기해서 재정리 하였다.


5. 조선통신사 : 관련자료가 잘 정리된 블로그 (201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

https://m.blog.naver.com/unesco114/221566878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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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일본 '나라'에 있는, 도다이지의 대불은 높이 약 15m(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건물인 대불전내)

  인데, 1590년대 호코지의 대불이 18m로 만들어 졌으니.. 얼마나 거대한것이었을지 어림짐작 할 수 있다.


- 당시의 조선통신사를 의전하는 일본관리도 귀무덤과 호코지의 배치와 조선통신사에게 이를 내보이는 행위를 비판했다. 하지만, 소수의견이었을 뿐, 메이지유신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영웅화하고 그 정당성의 확보를 위해서 귀무덤을 자신들의 전리품, 우수함의 증거로 여겼다는 점에서 그 의식이 참으로 안타깝다.

.

'그러나 반대 의견도 만만찮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메노 모리호슈(雨森芳州)이었다. 그는 통신사 외교에 있어서 빼놓을  없는 인물로서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외교관이자 지성인이었다. 그가  '교린제성(交隣提醒)'에 의하면 조선통신사들이 교토를 지나갈  일본측이 의 도적으로 귀무덤이있는 방광사에서 접대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는것이다.

 조선인에게 귀무덤을 보여준다는 것은 히데요시의 조선출병이 완전히 명분없는 전쟁이며, 양국의 수한 성의 목숨을 빼앗아간 포악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오늘날 다시 되 풀이하며 뽐내려고 하는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는 일본인의 무학과 무교양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

이와같이 조선인의 귀무덤은 임진왜란 이후 외교 사절단으로서 일본으로 갔던 우리나라의 사신들에게 일본인들은 그들의 무력을 시위하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일부러 보게함으로써 그 들의 무력을 은근히 과시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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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다 온것 같다. 자료들을 더 많이 찾아봐야 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2차 자료란것의 한계도 있고, 이정도쯤에서 마무리 해야지 싶다.


참고자료

교토!천년의 시간여행, 이현진, 한길사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 정재정, 효형출판

서울과 교토의 1만년, 정재정, 을유문화사

이순신의 바다, 황현필, 역바연

교토 귀무덤에 대한 일고찰, 노성환, 2009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52071&cid=62070&categoryId=62075


https://www.ge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2764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C%BD%94%EC%A7%80_%28%EA%B5%90%ED%86%A0%29


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B%8B%A4%EC%9D%B4%EC%A7%80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02904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3541


https://ko.wikipedia.org/wiki/%EB%A9%94%EC%9D%B4%EC%A7%80_%EC%9C%A0%EC%8B%A0


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C%9A%94%EC%BF%A0%EB%8B%88_%EC%8B%A0%EC%82%AC_(%EA%B5%90%ED%86%A0%EC%8B%9C)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346053&cid=40942&categoryId=33414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966961&cid=60591&categoryId=60591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404354&cid=40942&categoryId=39945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82%AC%EC%B9%B4_%EC%A0%84%ED%88%AC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C%95%BC%EC%8B%9C_%EB%9D%BC%EC%9E%94


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D%95%AD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C%BD%94%EC%BF%A0%EC%A7%80_%EC%97%90%EC%BC%80%EC%9D%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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