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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찡 Feb 17. 2016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06.  심술쟁이 여자친구의 참회록

우리에게도 그랬던 날이 있었다.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작은 표현에 가슴 설레던 날이 있었다.

매 순간 서로 같은 마음일까 궁금해했고, 연락으로 나누던 커져가던 마음을 느낄 때가 있었다.

같이 듣고 있던 음악을 공유하고 괜히 가사에 의미부여하면서 밤에 잠못이루던 날들이었고 다시 말하래도 말하지 못할 오글거리기 짝이 없는 표현들을 부끄러운줄 모르고 하루종일 화면을 두드리던 때가 있었다.

모든 신경이 손끝에 가있던 날들이었다.


우리는 엄청 크게 싸웠다. 연인들이라면 꼭 한 번은 싸운다던 '연락 문제' 때문이다.

잔뜩 화가나서는 그에게 한껏 쏟아부었다. 우리 관계에서 넌 '갑'이고 너를 더 많이 좋아하는 나는 '을'이라고.

아니 이제 나는 너한테 을도 아니야 병, 정 쯤 될거야 쳇.



멋지고 쿨한 애인되기를 포기했다.


내 인생의 목표는 '멋진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폼나는 것', '멋진 것'을 추구한다. 맞다. 허세스럽다.

예를 들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도 거뜬히 해내는 나' 라던가, '모두가 잠든 새벽, 나만 공부하느라 깨어있다. 나는야 진리의 청지기...!' 라는 말도 안 되는 허세가 나란 인간을 만들었다. 그런 내가 애인에게멋지고 쿨하게 구는 것을 포기할 리가 있을까? 아 정말이지 나도 쿨하고 멋진 애인이 되고싶었다. 뭘 하든 너그럽고 여유있게 받아주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어떤 상황이 와도 이성을 잃지 않고 떨어져 있어도 내 할일을 잘 하고 있다가 만나면 또 예쁘게 만나고. 그에게 여유를 주는 그런 멋진 애인 말이다.  

실제로 처음엔 '쿨하고 멋진' 이미지로 그를 '꼬셨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내 '멋진 성격'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나 만날 수록 나는 청개구리를 삶아 먹은건지 만화영화 <아따아따>의 고약한 '단비'가 빙의가 된 것인지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심술을 부리고 있다. 그가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때엔 나만 바라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떼를 쓰게 만들었다. 그가 늘상 함께 있을 수 있을땐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고개를 절렜다.

도대체 나는 왜 점점 변하고 있을까?


그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기분이 들어서.
그에게 나보다 중요한 것이 생기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다 보면 미친듯이 보고싶어져 울적해질 때가 오기도 하고  꼴도 보기 싫을만큼 미워질 때도 찾아온다.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해지는 날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다다익선의 미덕을 아는 커플이었다. 반년간의 장거리 연애를 겪었기 때문일까,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이 만나야한다고 생각했다. 강제성을 부여하고 '이 날은 꼭 만나야해!' 라고 못박아둔건 아니었지만 거의 매주 주말마다 만나고 있었고 평일에도 시간이 허락한다면 만나는 것이 좋았다.


 심술쟁이가 됐다.


 그러다 시간을 맞추어 가는 것이 점점 힘든 때가 오고 말았다. 나만 해도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하고, 9시부터 6시까지 정해진 근무시간을 지켜야 하며 바쁠 때는 야근을 밥먹듯이 한다. 봄, 여름, 가을에 비해 겨울인 이 맘때는 뜻밖에 여유시간이 많아져서 조금 당황스러워 지기도 한다. 반면 그는 시간이 많은듯하면서도 막상 쓸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내가 여유있는 주말에도 그가 바쁜 경우도 생겼고 내가 바쁜 평일에는 오히려 여유가 생기는 때도 있다.  그가 바쁠 때, 나도 바쁘고 내가 그와 만나고 싶고 그가 필요할 때 그도 나를 필요한 시간이 딱 맞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슬프게도 그런 타이밍이 딱 맞는 때는 굉장히 드물다.

 얄궂게도 상대 중 한 사람이 바빠지면 남은 상대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야한다. 그 여유속에 남겨진 누군가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 외로움은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언제나 그의 우선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던 내가 밀려나는 기분을 선사했다.

<아따아따>의 귀여운 심술쟁이 단비

나는 분리불안에 몸을 떠는 강아지가 된 것마냥 그와 떨어지는 게 힘들었다.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냐고 묻고 답장을 기다리고 시간이 지난 후 내가 받는 건? 그의 영혼없는 답장. 그런 것이 반복되다보니 서운함만 쌓이게 됐다. 서로 일하느라 바쁘고 피곤했으며 내가 깨어있을 땐 그는 잠들어있었고, 그가 깨어있을 땐 내가 잠들어있었다. 나를 만나는 순간에도 그는 글을 쓰고 일을 했다. 그걸 꼭 지금 해야 하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나마 같이 있는 시간에 일을 하는 그가 야속했다. 그래도 참아야지. 멋진 여자친구라면 연인의 바쁜 것 가지고 서운한 티를 내선 안되니까. 하지만 나는 참는 것이 어려운 인간이라 또 화를 내고 말았고 싸움은 반복됐다.


그의 고충을 이해한다. 아니 더 나아가 충분히 통감한다. 바빠죽겠는데 뭐하냐고 물으면 당연히 일한단 말 밖엔 할 수 없었을 것이고 틈틈이 답장을 해주는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 모르더라도 나는 알아야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지난 가을에 엄청 바쁜 시기를 보낸 나는 남자친구의 귀엽기까지한 투정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내가 마음 상할까봐 메시지를 보내는, 휴일에도 일을 해야하는 상황에도 나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람인 것을 내가 모를리가 없었다. 사람이 바쁘고 해야할 일이 많아지면 영혼이 피폐해지기 마련인데 여자친구란 작자는 서라운드 방향으로 그의 피를 말렸다.


그래서 네가 더 사랑한다고 생각해?


우리의 싸움은 심각하지만 사소한 이유 때문에 시작됐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서."

"너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 같아서."

"나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아 진 것 같아서." 란 이유들 때문이다.


'내가 더 좋아한다'로 내려진 결론은 언제나 싸움으로 이어졌다.

어떤 이유인지 상대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약자가 된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내가 더 사랑해서 그에게 귀찮고 부담스런 존재가 될까 두려웠다. 안절부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불편할 정도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과 과묵한 사람의 표현의 역치는 다르기 마련, 과연 표현만 가지고 사랑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나는 그의 마음을 진짜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날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고있었다. 그가 하는 노력들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냥 심통이 났다. 그의 마음을 잘 알면서도 내가 더 좋아한다느니, 내가 이 관계에서 을이라며 그에게 심술 부리는 나는 정말 잘못한 행동을 한 것이다. 내가 살짝 서운한것이 싫어서 그에게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게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진짜 못됐다.

정말 내가 그를 더 순수하게 사랑한다고 느낀다면 아마 이렇게 심술부리진 않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주고싶지 않으니까. 그냥 나는 그 가치를 싸움으로 몰고 갔을 뿐이다.


잠깐 철든 여자친구의 반성


 둘만 있던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은 사실, 많은 존재들과 함께 사는 곳이다. 또한 우리의 인간관계는 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친구, 선.후배, 직장동료 그리고 가족까지 있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어 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쭉 함께하려면 상대 이외에 존재들에게도 충분히 시간을 써야함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산 속에서 오두막을 짓고 그 오래전 황진이가 노래했듯 시간의 한 허리를 베어 둘만 있을때 구비구비 펼 수만 있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더 먼 미래를 함께 가고자 한다면 서로가 기댈 언덕이 되어 주어야 한다.싸우기만 하기엔 세상이 충분히 바쁘고 잔인하며 차갑다. 홀로 싸워 견디기도 벅찬 삶에 사랑하는 사람까지 더 짐을 지운다면 얼마나 고달플까. 연애를 하는 상대가 나와 감성을 공유한다고 하여 모든 일거수 일투족에 참견하고 옥죈다면 너무 지칠 것이 뻔하지 않을까. 이젠 안 그래야지.


내가 못되게 심술을 부리지 않고, 그를 응원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내가 바라던 쿨하고 멋진 애인이 되는 그런 날이 오긴 오려나. 우리도 서로에게 충분한 안식처가 되어 더 단단해질까?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할 수 있을까?


그래. 그 날이 오면. 그땐 해야지. 쿨하고 멋진 여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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