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2016 연애 자유 선언> 이라기엔 너무 사소한 글
"토요일에 일정이 여러개 겹쳐서 바쁠 것 같아. 이번 주말엔 쉬고싶은데.."
그의 입술에서 저 이상한 문장이 달콤한 그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와 내 귀에 꽂혔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 하노라.> 라 시작하던 기미독립선언서를 담담히 읽어낸 민족대표 서른세명이 종로경찰서에 몰려와 자수하는 걸 본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울었다. 아 정말 왜 그랬을까 모양빠지게. 왜 나는 한 번을 쿨하고 너그럽게 넘어갈 수없단 말인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 쪼그라들어서는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 타고 흘러가 꺼이꺼이 넘어가게 울었다. 우는 나를 그가 안으며 달랬다. 달래주니 더 눈물이 나왔다. 그는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토닥이던 손이 멈추고 그가 따스하지만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기야. 우리 헤어져?
맞다, 이건 '오버'다. "우리 이제 좀 생각할 시간을 가져." 이런것도 아니고 고작 '이번 주말엔 쉬고싶다' 잖아?
헤어지잔 말을 듣는것과 같은 충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볍고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터지는 눈물은 멈출줄 몰랐고 마음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그는 더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나는 됐다고 쉬라고 했다.
이렇게 바닥까지 다 드러낼 수 없었다. 아니 더 이상 내려갈 바닥조차 없었다. 내가 자존심 상하는 행동을 하면 할 수록 그가 멀어질까 두려웠다. 사실 그가 쉬자는 말을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직장인인 나는 주말과 평일의 개념이 뚜렷한 반면, 남자친구는 프리랜서에, 일과 취미와의 경계가 모호한 일을 하고 있어 가끔 보면 일과 휴식의 경계가 모호했다. 여유로워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유가 부재한 라이프스타일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이번 토요일에 무진장 바빴다.
바쁜 것도 알고, 지친 그가 쉬고싶은 것도 이해는 충분히 가지만 서운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주말은 우리만의 시간이잖아? 어떻게 그 날에 일정을 짤 수가 있지? 생각해보니 일 시작하면서 보는 시간이 확 줄었다. 양도 질도 다 떨어졌단 말이야 으허허어어엉이란 생각은 서운함이 물밀듯이 밀려와 나를 삼켜버렸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통화에서 드디어 그에게 실언을 와장창 퍼부었고 "다 그만둬 버리란 말이야 으헝헝헝헝 으엉어어엉" 이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눈물, 콧물을 쏟아냈다.
때는 새벽 두시. 그는 내가 퍼붓지 않아도 충분히 힘든 한 주를 보냈다. 금요일 늦은 밤, 토요일 자정을 넘겨 마감을 했고 몇 시간 자지도 못한 아침부터 팟캐스트 녹음 두 건에 또 팀 미팅이 저녁까지 진행되는 일정이었다. 주초엔 장염에 걸려서 수분이란 수분은 다 빠진 상태여서 말 그대로 녹초인 상태였다. 언제나 늘 그랬듯이 나는 그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는 투정 부리고 싶었다.
새벽 세 시. 우리는 싸웠다. 그도 나에게 서운했을 것이다.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을테니까.
그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진짜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행동의 중심은 내가 있었고 내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도 갖은 노력을 다 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투정을 부릴 때마다 그는 더 속상했을 것이다.
생떼를 쓴 내 변(變)을 하자면, 나도 힘든 한 주를 보냈다. 밀려드는 회의와 마감, 기획서와 PT 무더기 속에서 몸은 엄청나게 축나기 시작했고. 정신적으로 바닥을 드러냈다. 몸 여기저기가 고장이 나서 병원을 들락거렸고 각종 항생제를 섭취했다. 스테로이드 연고를 꾸준히 발라야 할 정도로 피부도 뒤집어지고 위장도 뒤집어졌다. 그가 너무 필요했다. 그가 나를 낫게 해주거나 내 피로를 씻겨주진 못하겠지만 그냥 옆에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때문에 힘들었다.
혼자만의 시간
이 말을 진정 두려워했다. 단어의 조합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혼자'만의 시간이라니!
저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둘 사이에 흐르던 물줄기가 큰 강처럼 범람해서 멀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연애 초기엔 우리는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절실히 원했다. 시간이 날갯짓을 할 때 마다, 손끝이 떨어질때마다 무너지던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계절 가는 줄 모르고 붙어있던 우리가 3년차 연인이 됐고 달라졌다. 우리의 애정의 형태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걸 인정해야했다. <동반자> 단계 말이다.
맙소사 그가 알면 조금 기뻐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전의 연애에선 비교도 안될만큼 그를 좋아하는 것 같다. 편안해질 수록 애정이 식을까 두려웠으니까.
사실 그는 나와 정말 다른 사람이다. 언어도 다르고 사고 회로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게 실감날 때가 있다. 서로 교제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각자의 성격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는 영화취향도, 음악 취향도 극명하게 나뉜다. 가끔 어떻게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까 의아할 때도 있다. 휴식만 해도 그렇다. 그는 지치고 힘들 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늦게까지 잠을 자고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충전을 한다. 반면 나는 말을 해야 한다. 끝도 없이 수다를 떨고 울거나 웃는 등 감정을 바깥으로 소비를 한 다음, 평화와 에너지를 되찾는다. 나는 홀로 시간을 가지면 우울해지고, 그는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걸 맞추는데 어렵진 않다. 나는 꽤 영특한 편이라 그를 충분히 정말 충분히 이해하고 그가 편안함을 느끼게 해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할진 훤히 알았다. 문제는 내 감정은 전혀 내 두뇌의 컨트롤을 따라주질 않았다. 울컥거리는 서운함과 눈물은 쿨하고 멋지고 예쁘기까지한 완벽한 여자친구 코스프레를 늘 망쳐버렸다. 울면 징징대고 실언하고 그러면 후회하고 그러면서도.
어쨌든, 나는 이번 주말을 혼자서 보냈다. 철저하게 혼자 보내보고 싶었다. 소감은? 꽤 좋았다. 아니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신생아처럼 잠을 잤고 읽어야겠다고 별렀던 책 두권을 정독했다. 먹고싶었던 음식을 먹었고 홈쇼핑을 보다가 마음에 쏙드는 니트 5종세트도 좋은 가격에 구입했다. 이렇게 혼자 여유를 가져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꽤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아마 2년 전쯤 혼자 여행을 떠났을 때 비슷한 기분이었다. 행복과 만족감!
맛있는 라떼를 마시며 햇빛이 부숴지는 창가에 앉아 글도 쓸 수 있으니 말이다. 얼마만에 여유인지! 그에게 이런 시간이 얼마나 절실했을지 이해가 됐다. 둘이 있을땐 느낄 수 없는 행복이란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직장인에게 휴가가, 학생에게 방학이 필요하듯이 그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카피처럼 연인의 본분에 굉장히 충실했던 그는 쉴 자격이 있었다. 그는 며칠동안 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한결같이 나에게 보냈던 다정하고 따뜻한 시선과 목소리로 날 찾아올 것이다. 그동안 남자친구 노릇하느라 고생했으니 며칠 푹 쉬고 나한테 오면 내가 진짜 잘해줄게. 휴가 갔다온다고 생각하고 나도 더 노력할 맛 나는 여자친구가 되어있을테니. 그래봤자 네가 잠 자거나 게임하는 거 밖에 더 하겠니. 휴가 중에 전화하는 상사처럼 굴진 않을게.
교제한 기간을 다 합친 것보다 요 며칠동안 스스로에 대해 참 많은 반성을 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만 보고 있어야한다던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 사실 감정이란게 다양한게 아니고 분노에 가깝지만- 퍼부어대듯 말하는 버릇 같은 거 말이다. 나중에 그를 만나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말해 달라고 해야겠다. 진심으로 고쳐보고 싶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엄청나게 다른 우리는 또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물론 우리는 또 답을 찾아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