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찡 Mar 31. 2016

봄이 왔나보다

09.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


따스한 햇살이 성큼 다가왔고 외투는 얇아졌다. 마침내 메마른 땅에서 초록 빛깔이 슬금 올라올 때가 된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봄을 기대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두꺼운 외투도 지겨워졌고 아지랑이 피듯 따뜻한 기운이 좀 퍼져서 얼어버린 마음도 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봄같은 기대와는 달리, 커리어는 늘 그렇듯 날 노예 삼고 싶어했다. 3월만해도 매주 조찬 회의가 있었다. 

조찬회의 소집 시간은 점점 이른 시간으로 당겨져서 채 세시간도 잠들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나는 매우 지쳤고 의미없는 다수의 회의자료에 치여 살았다. 그것은 무력감과 우울감을 낳았는데 꽤 심각했다. 그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화이트데이'를 맞았다. 



교제하는 기간이 길어질 수록 참으로 난감한 것이 '데이' 란 것이 다가올 때다. 연애 초기엔 박스 가득히 군것질 거리들을 챙겨서 보내주곤 했다.  그러다가 점차적으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미리 말해 그걸 선물로 주는 방향을 취했다. 우린 퍽 실용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것질은 살이 쉽게 찌는 나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역시 군것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 발렌타인데이에도 뭉친 그의 근육을 풀어줄 마사지 쿠폰을 선물했으니 필요한 것이 생기면 나중에 얘기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전화와 제안서, 회의자료를 준비하느라 그로기상태가 된 것 같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감일을 앞두고 데이터는 무지 많이 쏟아졌고 그걸 실시간으로 감당하기 급급했다. 아 하늘이시여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죠? 란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을 때에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도 고파왔다. 

상태바에 불빛이 반짝반짝 들어왔다. 남자친구가 점심으로 무얼 먹을거냐 물었다. 뭘 먹을지 모르겠지만 역전우동에서 우동을 먹고 빽다방에 들러 커피를 테이크아웃해갈거라는 남자친구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문득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볼까? 망설여졌다. 그가 '역전우동' 집에 가서 우동을 먹을 거라고 별렀던게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같이 점심먹을까 물어볼랬는데 안되겠군

- 아 그럴까? 그럼 내가 거기로 갈게!


그는 기꺼이 내게로 온다고 했다. 그의 오랜 계획을 망친것이 아닐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월요일 점심에도 그를 볼 수 있단 사실이 좋았다.  너무 지쳐있었으니 그의 얼굴이라도 보고 기운이라도 좀 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도착하기로 한 시간이 꽤 흘렀는데 도착하지 않았다. 살짝 기분이 상할 뻔 했다.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은 유일한 낙 아닌가! 전화를 해보니 거의 다왔단다. 뭐하느라 늦는거야 흥


짜증이 고개를 슬그머니 더 내밀었을 때 저 멀리서 그의 실루엣이 보였다.

쫄래쫄래 뛰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니 사랑스러워 마음이 풀렸다. 어 그런데 뭔가 있다. 


바로 프리지아 꽃다발!


예쁜 노란 프리지아 꽃다발을 내게 안겨주면서 화이트데이 선물을 했다. 향긋한 꽃내음이 지친 마음을 풀어주었다. 이 친구는 항상 이랬다. 가장 필요할 때 기꺼이 나타나서 날 행복하게하는 순간을 선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실용적인것을 추구함과 동시에 낭만까지 있는 사람이라 뭔가 필요한 걸 구해줬다고 왁자지껄한 날을 그저 "땡치기"에는 정이 없는 것 같아 아쉽긴 했을 것이다.

여자친구란 자(者)는 낭만은 무슨. 이름이나 안 까먹으면 다행인 사람이라 미안할 때가 참 많다.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언제나 '전투'에 가까워서 하루가 끝나면 늘 녹초가 된다. 열심히 하루를 '싸우고' 돌아오는 길은 매우 황량하고 마음엔 여유가 없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에게 '그냥 대충해도 괜찮다.' 고 말한다. 천성이 여유로운 그여서일까. 남자친구와 대화를 나누면 복잡한 일들도 명료해지고 단순해져서 마음이 평화로울 때가 많다. 그는 타고난 카운슬러여서 기본적으로 남의 말을 잘 경청하고 필요한 조언을 짧게 한다.


우울함과 무력감이 하늘을 찌르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역시 그에게 속상한 일들을 터놓았다. 나는 그에게 내 고민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는 절대 먼저 해결책을 제시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날 내가 우울했던 것은 일을 하다가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한 것 같기도 하고, 나만 속앓이를 하고 있던 상황들이 있었다. 

그 때 가만히 내 말을 듣던 그가 이런 말을 해줬다. 


"너는 항상 할 일을 해내고 행사가 잘 안되면 그건 다른 사람들 탓이야. 그리고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도 

내년에도 네가 이 일을 여전히 맡게 될거고 책임은 대표님이 지시는 거야. 너 하나 잘못했다고 회사가 뒤집어지지도 않고. 네가 담아야 할 가치있는 일들이 너무 많은데 이런 저런 걸 다 담고 있으면 이렇게 속이 곪지. 

예쁜아" 


그가 진심을 담아 위로를 하는데 내 모든 우울함이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얘는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줄 거란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불만스러웠던 모든 상황들이 참 얄궂게도 감사한 상황으로 바뀌었다.


남자친구와 만나다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깜짝 놀란다.  살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끝까지 내 편이 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줄 안다. 본의 아니게 조금씩 서로에게 나쁘고 상처를 줄 때가 어쩔 수 없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내 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한 일인지! 


화이트데이였던 날도 바쁘고 힘든 나에게 꽃다발 하나로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기쁨을 주었고 중간중간 일하면서 먹으라고 좋아하는 초콜릿도 가져다 주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무실 식구들에게 전해줄 초콜릿도 일일이 사서 나눠 주었다.  -남자친구는 우리 회사에 후원자 같은 존재라 다른 직원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화이트데이를 기점으로 그는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참 세심한 남자다. 




꽃다발을 풀어 예쁜 꽃병에 꽂아 책상에 놓아두며 하루종일 행복했다. 밤 늦게 야근을 해도 샛노란 프리지아가 마치 남자친구가 웃는 것 같아 마음을 가다듬고 업무를 끝낼 수 있었다. 이 남자를 만나면서 매일 아무 걱정없는 아이로 돌아가는 것 같아 행복하고 감사하다. 온기가 가까이 느껴지는 걸 보니 봄이 오긴 왔나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더 이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