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의 해외살이는 효일까, 불효일까
엄마: 딸~ 우리 식구 중에 네가 제일 출세했네
나: 웬 출세? 무슨 말이야?
엄마: 엄마, 아빠는 못 가 본 곳이 많은데
너는 해외 경험이 많잖아
날 출(出), 인간 세(世)
이 두 글자 안에는 세 가지 뜻이 담겨있다.
첫째,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하게 됨
둘째, 숨어 살던 사람이 세상에 나옴
셋째, 세상에 태어남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말한 '출세의 의미'와 딱 맞아떨어지는 풀이는 없다. 굳이 꼽자면 두 번째 지문이 그나마 근접하다. 숨어 살던 사람이 세상에 나오는 것도 '출세'라면 엄마 말대로 나는 출세한 게 맞다. 우물 안에 있던 시절을 '숨어 살았다'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는 말이 되니까.
첫 해외 경험은 스물넷, 그 해에 친구 따라 일본에 갔던 것. 그게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는 일 때문에 이따금씩 해외 촬영을 다녔다. 그러다가 서른 즈음에는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여행과 생활은 결이 달랐다. 무모했기에 저지를 수 있는 모험이었다. 그렇게 해외에서 살아보는 건 밴쿠버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난데없이 체코에 와 있다.
밴쿠버 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왔을 때, 엄마가 울먹이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다시는 멀리 나가지 마, 알았지?" 잠깐 여행도 아니고 한동안 살다 오겠다고 홀연히 떠나버린 딸 자식. 그런 내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봐야만 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런 일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겪게 해 드렸으니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다.
남편: 우리가 해외로 나가면
양가 부모님이 많이 서운해 하시겠지?
나: 휴... 그야 당연하지
그렇지만 지금으로써는 이게 최선이잖아
남편: 맞아. 결국에는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효도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벌써 1년이 지났다. 영상통화를 할 때마다 다시 만나게 될 날을 약속한다. 언제가 될는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부모님을 체코로 모시는 날이 온다면... 지금의 이 불효를 조금은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엄마 말이, 해외 경험이 많으면 출세한 거라고 했으니까. 이참에 양가 부모님 유럽여행 시켜드리면 밀린 효도 마일리지를 통 크게 쌓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프라하 뷰 맛집
프라하는 체코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다. 이 말은 즉, 체코 여행의 주목적이 다른 곳에 있다 하더라도 프라하는 반드시 거치게 돼 있다는 얘기다. 물론 프라하가 아닌 다른 경로로 드나드는 여행자들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프라하는 이름값 톡톡히 하는 세계적인 관광 도시답게 수많은 숙박 시설을 자랑한다. 어떤 곳은 입지가 좋고, 어떤 곳은 조식이 끝내준다. 어떤 곳은 객실이 아늑하고, 어떤 곳은 주차가 편리하다. 그 많고 많은 선택지 중에서 'c' 호텔을 으뜸으로 뽑은 까닭은 다름 아닌 수영장 뷰 때문이다.
호텔 탑 층에 오르면 아늑한 실내 수영장을 만날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입을 다물 수 없는 황홀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꼭 수영을 즐기지 않더라도 부모님께 썬베드에 누워 보시길 권하고 싶다.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지는 노을과 그림 같은 빨간 지붕의 자태. 그림에 생명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토록 오묘한 풍경을 어른들께 선물할 수 있는 그날이 머지않았길 소망해 본다.
프라하에는 11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 건축된 유럽 양식의 건축물이 다양하게 남아있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고풍스런 건축물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여행 경험이 없는 부모님께는 꽤 이국적인 시간이 될 것 같다. 프라하 성은 체코의 대표적인 관광 코스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적 상징물이자 유럽 전체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성이다. 9세기 말부터 짓기 시작해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구시가지의 블타바강 맞은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프라하 성. 그 위를 거닐다가 눈에 익은 간판을 발견했다. 18세기 성 위에 21세기 카페라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단지 걱정인 건, 무릎이 좋지 않은 부모님께는 이 코스가 다소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유럽은 어딜 가나 바닥이 매끄럽지가 못하다. 그래서인지 조금만 걸어도 다리에 피로가 쌓인다. 그렇다고 일생일대의 볼거리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하고 지치기 전에 기념사진부터 남기는 게 좋겠다. 그러다가 숨이 차오르면 프라하 성의 명소, 별다방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티 타임을 가져볼까 한다.
사실 여행에서 가장 힘든 건 음식이 아닐까. 따끈한 쌀밥과 국이나 찌개에 길들여져 있는 한국인에게 가장 괴로운 건 '양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꼭 한 번 다시 찾고픈 레스토랑이 있다. 작년 봄, 독일에 사는 사촌 아주버님 가족들과 프라하에서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그때 아주버님이 지인에게 추천받은 근사한 음식점이 있다며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식사였다. 외국영화의 한 장면 같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음식을 맛봤다.
맛도 기대 이상이었지만 그보다 분위기에 흠뻑 취했던 잊지 못할 공간이다. 골드 장식과 조명이 돋보이는 세련된 인테리어에 멋스러운 유럽인들 속에서 어우러진 근사한 저녁. 어른들 입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유럽에 오셨으니까 한 끼 정도는 이런 곳에서 대접받는 기분을 느끼셨으면 좋겠다. 비록 숙소에 돌아가 즉석밥에 고추장을 비벼 먹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체코 우리집
오스트라바 가이드
프라하도 좋지만 부모님이 가장 와 보고 싶은 곳은 오스트라바에 있는 딸네 집이 아닐까. 집은 어떻게 생겼는지, 이웃들은 친절한지, 생활에 불편한 건 없는지, 그런 게 더 궁금하시리라. 수도인 프라하에서 차로 약 4시간 가량 달려야 오스트라바에 있는 우리집에 도착할 수 있다. 딸이 사는 집은 어떤지 구경도 할 겸, 하루 이틀 여독을 풀고 나면 가까운 곳부터 동네 구경을 시켜드릴까 한다.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오스트라바 동물원. 이곳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놀기에도 좋지만 어른들 산책 코스로도 인기다. 어른 넷에 아이 한 명. 다섯 명 입장료가 2만 원도 채 되지 않으니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다.
만약 여름에 오신다면 부모님과 함께 캠핑을 해보는 것도 특별한 추억이 될 것 같다. 오스트라바 인근에 있는 가장 유명한 오토캠핑장 이름이 '바슈카'다. 입구에 있는 작은 오두막을 지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텐트동이 나오고 그 앞으로 잔잔한 호수가 흐른다. 오토캠핑장이기 때문에 샤워실과 조리시설도 갖춰져 있어서 큰 불편 없이 여름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다.
체코에 와서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비렐'이라 불리는 무알콜 맥주다. 맛은 영락없는 맥주인데 알코올이 없어서 음료수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다. 최근에 남편과 함께 한식당에서 김밥과 치킨을 사 들고 축구 관람을 다녀왔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서 괜찮겠거니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바람이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닌가. 결국 부푼 마음으로 준비해 간 음식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오들오들 떨다가 돌아와야 했다. 만약 부모님이 오실 무렵에도 경기가 열린다면 다시 한번 그날의 열기를 느껴보고 싶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 것도 하지 않아도 다시 만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저 그것만으로도 족할 것 같다. 양가 부모님들은 물론이고 수원에서 일하고 있는 남동생과 곧 배가 불러올 여동생, 그리고 올해 고3 수험생인 막내까지 모두 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그런 날을 꼭 가질 수 있길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