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이의 얼굴은 꼭 삶은 달걀 같다. 갓 삶아낸 달걀 하나를 찬물에 헹구어 바스락거리는 껍질을 벗겨내면 하얀살이 탱글거린다. 속에 든 노른자가 비칠 만큼 깨끗하고 투명하다. 유정이도 그렇다. 통통한 볼살 사이로 실핏줄이 드러날 만큼 티 없는 얼굴로 방실거린다. 그 아이가 그럴 때면 축 늘어진 내 입꼬리가 반사적으로 실룩인다.
"오늘은 우리집에서 놀자~ 응?"
"숙제는 어쩌고?”
"에이 참! 너한테 보여줄 거 있단 말야"
유정이는 벌써 종례 시간을 잊었나 보다. 선생님이 노란색 몽당 분필로 빼곡히 적어내려가던 것이 전부 오늘 안에 끝내야 할 숙제였다는 것도. 손에 묻은 분필가루를 털어내며 칠판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서 있던 근엄한 표정도. 모두 싹 잊은 듯이 마냥 천진하다.
열 한 살 소녀들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멀리서 들으면 재잘대는 새소리 같지 않을까. 둘이서 쫑알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유정이네 대문 앞이다. 군데군데 녹이 슨 초록색 양철문이 굳게 닫혀있다. 그런데 그때. 사자 문양을 한 문고리 틈 사이로 알 수 없는 생명체의 기척이 새어 나온다.
"이게 무슨 소리야?"
"너도 들었지? 얼른 들어와. 우리 삐약이들 보여줄게"
유정이가 상기된 얼굴로 앞장선다. 한껏 으쓱거리는 어깨를 보며 나도 따라 걷는다. 마당을 가로질러 처마 끝에 이르니, 못 보던 종이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유정이가 오른손 검지를 입에 가져가며 "쉿!" 하고는 조용히 몸을 낮춘다. 어깨를 맞댄 우리는 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구부정한 자세로 상자 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삐약. 뺙. 뺙. 뺙. 삐야악..."
자그마한 종이 상자 안에는 연노란빛을 띠는 솜뭉치들이 아장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한 가느다란 두 발로 세상을 딛고 서 있었다. 처음으로 유정이가 부러워졌다. 이렇게 예쁜 병아리들을 매일 볼 수 있는 유정이에게 나도 몰래 질투가 났다.
며칠 후. 엄마가 심부름을 시켰다. 그 시절 우리 동네에는 달걀만 파는 상점이 있었는데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톡 쏘는 닭똥냄새가 풀풀 진동을 한다. 그럴 때면 순간적으로 코가 마비되는 것 같은 어지러움증을 느낀다. 주인아저씨가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숨을 참으며 나직하게 엄마의 주문을 읊는다.
"아저씨! 저희 엄마가요. 달걀 다섯 알만 사 오래요”
손잡이가 달린 하얀 비닐봉지가 아래로 볼록하게 쳐졌다. 신주단지를 받아들고, 가게문 밖으로 조심스레 발을 떼어본다. 달걀집에서 우리집까지 서른 발자국이나 될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도 나는 내가 못 미더워 시선이 자꾸만 봉지 끝에 매달린다.
'스물 하나.. 스물 두울... 자, 이제 집까지...'
퍽. 푸지직~
대여섯 발자국만 더 걸으면 집인데. 흐어엉.. 과하게 조심하려던 나머지, 발이 뒤엉키고 말았다. 손에서 미끄러진 비닐봉지가 이내 바닥으로 툭 떨어져 흉하게 널브러졌다. 깨진 껍질 사이로 노란물이 흥건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골목길 한복판에서 달걀을 깨뜨렸을 때의 행동요령 같은 건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 너무 당황한 탓에 그저 멀뚱히 보고만 섰다.
'선생님은 왜 숙제만 하라 하시고
이런 건 가르쳐주지 않으실까'
'내가 달걀을 다 깨 먹은 걸 알면
엄마한테 무척 혼이 나겠지? 휴..’
그런데.. 그보다 먼저 떠오른 건 유정이었다. 솜뭉치 같던 삐약이들은 유정이네로 온 지 사흘 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떠나버렸다. 고작 달걀 몇 개 깨진 걸로도 이렇게 속이 상한데 유정이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에도 노란 물은 겉잡을 수 없이 퍼져 내 발밑까지 노랗게 노랗게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