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비가 내린다
뜨거운 머리 위로
처진 어깨 위로
비루한 발등 위로
하염없는
빗물이 쏟아진다
오늘 내리는
이 비는
반짝 소나기려나
부연 안개비려나
거센 장대비려나
볕을 머금은
여우비라면 어떨까
긴 가뭄을 해갈할
단비라면 어떨까
그런 날이 있었다. 예고 없이 비를 퍼붓던 날이.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우산이 없더라. 그럴 땐 도리가 없다. 그저 젖는 수밖에. 여민 마음을 풀어헤치고 온전히 적시는 것 외에 무슨 방도가 있을까.
그저 걷는다. 아득한 빗속을 헤매인다. 어떤 비는 솜털처럼 보드랍고. 어떤 비는 칼날처럼 찌른다. 심장에 콕콕 우박이 박힌 자리. 맨홀처럼 움푹 파인 그 자리를 힘겹게 돌아본다. 세상에 아물지 않는 상처는 없지만, 상처가 다 아물어도 아픔은 남는다.
이상하리 만큼 아무 일도 없는 날. 그런 날엔 실없이 불안이 온다. 그래서일까. 웬만큼 힘든 시기도 지났고, 이만하면 별 일 없이 산다 싶은데.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날에도 이 놈의 몹쓸 무의식은 기어이 과거의 어떤 날로 나를 끌고 간다. 도망치고 도망쳐도 제 자리. 기어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날처럼 비를 맞는다.
"비야 비야 오지 마~ 다른 날 다시 오렴~
나는 놀고 싶어~ 비야 비야 오지 마~"
조그마한 입술이 흥얼흥얼. 옆에서 아이가 노래를 부른다. 비야 비야 오지 말라고. 다른 날 다시 오라고. 대책 없이 말간 얼굴로 나를 붙든다. 멈추지 않는 비는 없다고. 그러니 이제 다 괜찮다고. 꼭 이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다.
우산이 생겼다.
비 그친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