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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필 Mar 06. 2024

하늘에서 불 껐어?

여름밤의 잔상

"엄마, 엄마!"

"응, 왜?"

"하늘에서 불 껐어? 그래서 우리, 집에 가는 거야?"

"뭐라고? 그래, 맞네. 하늘에서 불 껐네."




위의 대화는, 지금으로부터 약 35년 전에 어린 나와 젊었던 엄마가 나눈 말이다. 종일 남의 가게에서 일하다 다저녁이 된 어느 눅눅한 여름밤. 남의 집 셋방에 지친 몸 누이러 어린 딸 손 잡고 걸어가던 길. 그 길 위에서 주고받은 작고 반짝이는 말들이 우리를 살렸다. "엄마, 하늘에서 불 껐어?" 세상의 시름과 부침을 알 리 없는 꼬마가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목을 쭉 빼고 눈을 꿈뻑였다. 어둑한 밤하늘과 어둠 속에 가려진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그러고는 오밀조밀한 입술을 달싹거려 그 말을 지었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복잡하게 슬픈 어른을 살리는 건 아마도 단순하게 천진한 아이들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소설가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책에는 아홉 편의 단편이 들어있는데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아버지'이다. 그중에 세 번째로 실린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를 넘기다 보면 이런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아버지의 여름은 어느 바다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더벅머리에 빨간 사각팬츠를 입은 채 웃고 있다. 나는 그 웃음이 다신 볼 수 없는 사진처럼 느껴져 마음 아프다. 아버지는 훤칠하지만 몸에 근육이 하나도 없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더벅머리에 빨간 사각팬츠를 입은 남자는, 한 여자를 만나 사랑했을 뿐인데 얼결에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가 되는 일에 사전 준비 같은 건 없었다. 아버지. 아비. 그 말의 하중을 헤아릴 나이가 되기도 전에 덜컥 생명이 태어났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 자신의 탄생 비화를 듣고 싶어 할 나이가 되어서는 졸지에 홀아비 소리를 듣는 신세가 되었다. 자칫 비극적으로 비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작가 특유의 기지로 해학적으로 그려졌다. 세상살이에 무력해진 남자어른이 아니라 순진무구한 아이를 화자로 세웠기에 가능했으리라. 찰리채플린도 말했듯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엄마, 이것 봐!"

"응."

"응,만 하지 말구"

"으응, 왜?"

"이것 보세요. 내 이름."

"어, 정말이네! 세상에..."

"어때? 나 잘 쓰지?"

"그러게. 오구. 우리 애기가 글씨를 쓰다니. 오구 잘했어."


아들의 이름은 선명할 찬. 인도할 빈. 찬빈. 고사리 같은 손을 공처럼 말아서 연필 한 자루를 움켜쥔다. 꼬챙이처럼 솟은 연필이 머리를 까딱까딱 흔들 때마다 지렁이가 지나간다. 꿈틀대는 선들이 오묘한 형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나의 꼬마가 "엄마, 이것 보세요!" 하고 손을 번쩍 들면 그제야 드러나는 신비한 글자들. 하얀 종이 위에 누워있는 이름은 찬빈이 아니라 친.반. 혹은 칭.빈. "어, 정말이네! 세상에..." 나는 살짝 고개를 돌린다. 의기양양하며 한껏 사기가 오른 다섯 살이 눈치채지 못하게 피식, 하고 소리 죽여 웃는다. "오구 잘했어." 다시 봐도 너무 기특하고 기 막혀서 오른손 검지 첫마디에 둘둘 반창고를 감다 말고 반달눈을 한다. 잠깐의 응대(?)가 끝난 후에는 하던 일을 마저 하려 손끝에 힘을 준다. 몇 년째 주부습진이 애를 먹인다. 항상 같은 손가락, 같은 마디만 고질적으로 찢어진다. 거친 살갗 사이로 피가 고인다. 치이익. 싱크대 수도꼭지를 돌려 그릇을 씻어볼까. 고무장갑 사이에 스며든 습기가 반창고를 뚫고 상처를 파고든다. 손이 쓰라려 한쪽 눈살을 찌푸리는데... "엄마, 이것 봐. 이것 좀 보세요~"를 돌림노래처럼 반복한다. 살다보면 비극과 희극이 교묘하게 손을 잡고 혼을 쏙 빼는 날이 있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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