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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mie Oct 13. 2018

첫 번째 태동, 그리고 안정된 나날들

미국 예비맘의 임신 이야기_임신 중기 (15주-19주)


언제쯤 끝나려나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고, 6주부터 시작했으니 정말 지독히도 오래 나를 괴롭혔던 입덧이 점점 사라져갔다. 보통은 13주 정도면 입덧이 사라진다고들 해서 나도 그러려니 기다렸는데, 13주를 넘어서고도 의외로 오래 지속되는 입덧에 무척 불안했었다. 내가 바로, 출산 직전까지 입덧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대- 라며 전설처럼 회자되는, 그 생각하기도 싫은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건 아니겠지? 그랬는데 다행히, 정말 천만 다행히도 18주로 넘어가는 시기 즈음에 입덧은 거의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 기간 동안 받았던 검사들은 15주에서 18주 사이에 받아야 한다는 APF Blood Test18주에서 19주 사이에 받았던 정기 검진이 있다. 


APF Blood Test의 정확한 설명은 Serum AFP screen for open neural tube defect (like spinal bifida)라고 하는데, 이 검사는 특별히 예약을 할 필요 없이 해당하는 기간 중 내가 원하는 날 아무 때나 가서 피만 뽑으면 됐다. 이 해당하는 기간이라는 것도 지난 두 번째 정기 검진 때 서면으로 다 정리해 주어서, 헷갈일 일 없이 정확한 시기에 가서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검사하는 방법도 워낙 간단했고, 이틀 뒤에 나온 결과까지 아주 좋아서 아주 편안하게 지나갔던 AFP Blood Test. 그래, 이런 검사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좋았던 기분도 잠깐, 18주가 넘어갔던 병원에서의 정기 검진에서는 조금 속상한 일이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병원의 대기실


정기 검진은 언제나 그랬듯, 간호사와 체중과 혈압을 잰 후, 의사와 궁금한 점이나 불편한 점들에 대해 상담을 하고 마지막으로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배가 조금은 나와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날 진료, 그러니까 세 번째 정기 검진 때부터 줄자 같은 걸로 배의 크기도 측정하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조금만 기다리라며 나간 뒤, 밖에서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두 명의 의사가 진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처음 보는 한 명의 의사는 이 병원에서 막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그 의사가 시스템을 배워야 하는데 진료를 볼 때 함께해도 되겠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당연히 웃으며 괜찮다고, 새 의사를 환영해주었다.


처음엔 그 새로운 의사가 그냥 우리의 진료를 바라보기만 할 줄 알았는데, 시스템을 아주 제대로 가르쳐 줄 모양인지 전체적인 진료를 모두 그 의사가 보게 하려는 것 같았다. 내 차트를 보고 상황을 이해한 후, 불편한 점이나 기타 등등의 상담을 이어갔다. 조금 산만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이었던 상담 후에는 줄자로 배의 크기를 측정해야 하는데, 이 의사가 줄자가 어디 있는지 몰라 한참을 헤맨 것은 애교 수준. 결정적으로 이날엔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의사는 기계를 두 번이나 바꾸어 가며 배 이곳저곳을 무척이나 세게 꾹꾹 누르며 심장 소리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기계를 배에 가져다 대는 순간 바로 심장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했는데, 정말 그때 내 담당의사의 말처럼 이 기계로 심장 소리를 듣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구나, 생각되던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간이 초음파 기계 같은 걸 가지고 와 심장 소리 없는 아이의 움직임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누워 있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의사 둘이서 아주 양호하다 괜찮다 하니, 그냥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사실, 이 시기쯤 되면 남들은 아이의 태동을 느끼기 시작하고도 남을 시기라는데 아직은 태동을 느끼지도 못했고, 지난번 진료 때는 4파운드나 늘어있던 체중이 이번에는 2파운드도 채 늘지 않아 아이의 성장이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내내 걱정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 4주 만에 한번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날이었는데, 결국 아이의 심장 소리도 듣지 못하고 병원을 나서야 하다니 너무나 속이 상했다. 남편은 당장 일주일 뒤면 정밀 초음파를 하러 갈 테니 너무 걱정 말라며 나를 토닥였지만 (설상가상으로 이 초음파는 초음파 담당 직원이 오프라며 갑작스레 한주가 밀렸다), 영 불편했던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정기 검진이 있던 바로 다음주에 우리는 이사를 했다. 사람을 불러서 하루 만에 이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넉넉하게 일주일 정도 시간을 잡고 우리 둘이서 이사를 해도 괜찮을지를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엔 둘이서 어떻게 해보자고 결정을 내리고 일주일 동안 천천히 가구들을 옮기고 있었던 시기.


여느 밤처럼, 차에 실을 수 있는 만큼 작은 가구들을 잔뜩 싣고 새 집으로 옮긴 후 다시 살던 집 아파트로 돌아와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는데,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순간이 찾아왔다. 아이의 첫 태동. 뱃속에서 꿀렁, 하는 감각이 느껴져서 깜짝 놀라, 어?!, 하고 잠시 있어봤지만 움직임은 그때 한 번뿐이었다. 


남편은 내가 짐을 옮기느라 무리한 탓에 배가 아파 그러는 줄 알고 어쩔 줄 몰라서, 왜 그래? 뭐야 왜 그래? 호들갑을 떨어댔다. 안심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나 역시 방금 내가 느낀 그것이 태동이 맞는 건지, 영 자신이 없었다. 그냥 배탈 날 때 장이 꿀렁거리는 느낌과 비슷한 감각이었던 것 같다. 의사도 그랬고 다른 후기들을 봐도 처음 느끼는 태동은 뱃속에서 공기 방울 같은 것이 움직이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기엔 훨씬 더 묵직한 움직임이었달까.


잘은 모르겠는데, 방금 OO이가 움직인 것 같아.


남편은 내 예상보다 훨씬 흥분하며 기뻐했다. 그래서 더욱 불안해진 마음에 (이때만 해도 뱃속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있는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잘 모르겠어, 그냥 장이 꿀렁거린 건가, 장 트러블 같은 건가, 태동이라면 왜 한 번만 이러고 말겠어, 등등 온갖 불안한 첨언들을 이어갔었지.


뱃속의 아이가 그런 내 불안을 알기라도 한 듯, 하루 이틀이 지나며 태동은 조금씩 더 잦아져갔다. 특히 가만히 있다가도 일하고 돌아온 남편 목소리가 들리면 갑자기 태동이 느껴지는 순간들도 많아서, 벌써부터 자기를 엄청 좋아하나 보다, 우스갯소리도 할 만큼 (우스갯소리였지만 남편은 무척이나 기뻐하였다).


입덧이 사라지고 나니 예전과 다르게 식욕도 무척 왕성해져서 이런저런 음식들이 먹고 싶어 지고, 입덧이 있을 때는 냄새도 맡기 싫었던 맥주나 와인 같은 것도 마시고 싶어 졌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그럴 수는 없지.


너무 참기만 했으니까, 오랜만에 스테이크에 와인 한잔 할까? 


남편의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래서 의아스럽기보단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못 먹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저런 소리를 할까? 하지만 남편은 빈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다 생각해 둔 바가 있었던 것. 바로 논알코올 와인이었다.


뛸 듯이 기뻐서 당장에 와인을 구입해 왔다. 늘 흡족하기 그지없는 남편표 스테이크도 너무 붉은 끼가 많을 때 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임산부에게도 적절할 만큼 잘 익힌 다음 설레는 마음으로 와인 오픈! 그랬는데... 이게 무슨 와인이야, 그냥 포도주스 같은데? 와인의 맛은 영 실망스러웠다.


그렇다 해도, 날 만족시켜주려던 남편의 노력마저 작게 보면 안 되는 거니까. 이 날의 저녁은 맛보다 행복이었다.


의외로 이후 치킨 윙과 함께 먹으려고 사온 논알코올 맥주가 맛이 좋았다. 신경 쓰지 않고 먹으면 보통 맥주를 먹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맥주에는 아주 소량이긴 해도 알코올이 들어있기는 하다고 하니 너무 자주 마시지는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래도 논알코올 와인이나 맥주가 있다는 것은 임신 기간 중의 작은 즐거움이긴 한 것 같다.


실망스러웠던 논알코올 와인과, 의외로 맛있었던 논알코올 맥주


지금은 임신 기간 중 가장 안정적이라는 임신 중기.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배와, 하루에도 몇 번씩 뱃속에서 아이가 보내오는 신호만 아니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도 없을 만큼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뱃속에서 아이가 연신 움직여 대니 이제 정말 우리가 둘이 아니라 셋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 눈 앞에서 이렇게 꼬물꼬물 움직이겠지, 생각하면 귀엽기도 하고. 날이 가면 갈수록 아이를 만나게 될 날이 더 손꼽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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