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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 엄마 Mar 07. 2020

이유 없이 아이가 울 때..

아니, 뒤집어질 때..

평상시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코로나 19로 인해 아이는 나와 일주일째 바깥 구경을 하지 못했고, 어찌어찌 하루가 지나갔으며 어김없이 아빠는 저녁 7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인 아빠를 아주 기쁘게 반겼고 저녁을 함께 먹고 난 후 나는 설거지에 돌입하고 아이는 아빠와 즐거운 놀이시간을 가졌다. 

아이는 온 거실과 이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는 모든 놀이를 아빠와 함께 찾아 헤맸고, 나는 작은 방으로 들어와 밀린 스케줄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잠들기 전에 30분 내지 한 시간 정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엄마와 함께 누워서 읽는,, 아주 평화로운 일상이 지나가는 듯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동차 책을 보고 있던 그때, 갑자기 나에게 아이는 엄마랑 같이 썼던 '편지'를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거실로 나와 한참을 서성이다가 나름 유추에 성공해 아이가 찾아 달라던 '편지'라는 의미의 종이를 찾아냈고, 아이의 손에 쥐어 줌으로써 사건이 일단락되는가 싶었다.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펜을 우겨쥐고 엄마 아빠 글씨를 따라 써 본 종이가 바로 그 편지였다. 편지를 한참을 바라보던 아이는 다시 나에게 글씨로 빈 공간을 채워달라고 했다. 나는 가능한 내가 가진 모든 눈썰미와 손재주를 끌어모아 아이가 끄적인 상형 문자들과 똑같이 그려주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평소와 다른 일상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그린 그림들을 한참을 들여다보던 아이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내가 그린 상형 문자들이 자기가 쓴 그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내 눈에는 똑같게만 보이는 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다름의 차이를 집어내는 것일까? 한숨을 속으로 삭히며 똑같이 해보려고 몇 번을 안간힘을 써보아도 아이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며 아이의 고개가 점점 뒤로 넘어가고 눈이 점점 풀리는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이는 울기 위한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아이가 우는 이유를 엄마가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때, 아무리 달래주어도 달래지지가 않을 때, 아무리 불러도 이미 나의 목소리가 아이를 스쳐 지나갈 때, 초롱 초롱했던 두 눈이 점점 초점을 잃어갈 때.. 

나는 아이가 질러대는 비명 같은 울음을 온몸으로 받으며 동굴로 들어간다. 

지금 아이의 뇌 속에서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다 정신을 놓는 게 아이인지 나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그즈음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 혹은 그 이상을 버텨내면 끝이 보인다. 눈물범벅이 되어 잠든 아이의 얼굴과 마주하고 나면 나는 이내 알 수 없는 자괴감과 죄책감이 맞물려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도대체 왜 우는 것일까... 나는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홀로 깨어 한참을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알게 되었다. 

아.. 아기 때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이 울었었지. 

평화로운 나날들에 대한 간격이 지금보다 훨씬 더 짧았었지. 이제 좀 살만해졌다고 그새 까먹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 아이는 유독 많이 우는 아이였다.

사실 지금도 우리 아이가 왜 그렇게 우는 건지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나마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암담한 순간이 지나가고 아침 해가 떠오르고 나면 아이는 천사 같은 예쁜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온다는 것뿐이다. 


아이에게 있어 울음이란 어떤 의미일까?

엄마로서 유독 달래지지 않는 아이의 울음은 좌절과 죄책감 등 복잡한 감정들을 남기고 슬픈 마음이 그곳에 한참을 머물다 간다. 언어치료사로서 아이의 울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만히 되짚어 보면, 순한 양과 같은 우리 아이를 순식간에 잠식해버리는 울음의 정체 또한 넓은 의미의 언어, 곧 '의사소통'의 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엄마에게 잔소리를 할 정도로 언어가 견고해지고 언변이 화려해진 이 순간에도 아이의 울음은 많은 의미를 가진다. 자기도 모르게 쌓인 감정들을 해소하기 위한 출구인지 스트레스에 의한 뇌의 발작적인 반응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 또한 아이가 나에게 하는, 엄마라는 세상에 대항하는 나름의 의사표현인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언어'라고 하면, 어떤 문법 구조를 갖추고 있는 그런 문장들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언어'라는 단어의 의미를 좀 더 넓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언어의 의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아이의 울음 또한 넓은 의미로서의 '언어'이다. 


부모는 내 아이가 또래 아이들보다 유독 말이 느리다는 생각이 들면 불안감이 엄습하고 연령이 늘어가면 늘어날수록 애가 타기 시작한다. 아이는 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전달되지 않으니 자신의 욕구가 해소되지 못함을 울음으로써 엄마에게 터트려내고 엄마는 그런 아이를 하루 종일 징징대고 떼만 쓴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를 괴롭히기 위해 징징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엄마에게 자신만의 '언어'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말이다. 단지 그 '언어'가 엄마가 생각하는 의미의 '언어'가 아닌 것뿐이다. 

하루 종일 자신의 언어가 무시되고 있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엄마의 인정과 반응이다. 아이가 가슴에 품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지금 당장 엄마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금 네가 무언가를 스스로 표현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인정해주고 반응해주어야 한다. 아이가 엄마에게 보내고 있는 신호가 엄마가 원하는 신호로 전환되기 전까지 말이다. 아이가 유일하게 보내고 있는 그 신호들을 끊어지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어떤 방식이든, 어떤 형태로든 엄마는 인내하며 그 신호에 응답을 해주어야 한다. 그것도 일회성이 아닌 한결같음으로. 그것이 엄마와 아이의 대화의 시작이자 언어 치료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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