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베란다에 나온 딸이 "어? 달님이 가버렸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아이에게 "낮에는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달이 보이지 않는 거야. 달은 빛나는 것이 아니라, 해의 반사광이 달 표면에 닿아서 간접적으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빛의 양이 세지 않아."라고 과학적으로 설명해주었지만 전혀 흥미가 없어 보였다.
-뇌 과학자 아빠의 두뇌발달 육아법 中에서-
올해 4살이 된 아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은 "왜?"이다. 의문사에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 왜"라는 육하원칙이 존재하지만, 우리 아들은 이 육하원칙을 단 한마디로 해결한다.
"왜?"
우리 가족이 8년차 살고있는 우리집은 지은지 30년이 가까이 된 꽤나 오래된 아파트이다. 오래된 아파트라서 그런지 벽지 아래 벽은 금이 쫙쫙 가있고, 이사할때 방문을 새로 교체하지 않아 화장실문을 여닫을 때마다 나무 문이 비틀어내려앉아 문지방을 부욱 긁는 소리를 낸다.
유독 궁금한 것을 못이겨하는 아들을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가장 불편한 점은 금이 간 벽도 아니고, 시끄럽게 문을 여닫는 소리도 아닌 시도때도 없이 울려대는 화재경보기 소리이다.
태어날 때부터 유독 청각이 예민했던 우리 아이는 시도때도 없이 울려대는 화재경보기 소리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깊이 잠든 새벽에 누군가 복도에 나와 담배를 피워댔는지 화재경보기 소리가 고요하던 집안을 마구 뒤흔들면 갑작스럽고도 인위적인 소리에 아이는 발작적으로 온 몸을 떤다. 말을 하기 이전에 모든 표현을 울음으로 일삼았던 시기에는 그저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주기만 하면 되었는데, 조잘조잘 자신의 논리를 펼치기 시작한 요즘에는 아이를 논리적으로 진정시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왜 화재경보기가 울리는거야?"
"아빠가 경비실에 전화해봤는데, 6층 복도에서 누가 담배를 피웠대. 그래서 그 연기를 화재경보기가 불인지 알고 울린거래."
"왜 담배를 피웠는데 화재경보기가 불인지 알았대?"
"화재 경보기는 연기가 나면 불이라고 인식하도록 만들어졌거든. 그래서 화재경보기가 울린거래."
"왜 연기가 나서 화재경보기가 울린거래?"
"6층에 어떤 아저씨가 담배를 복도에서 피웠대. 그래서 연기가 난거야."
"왜 담배를 피워서 화재경보기를 울리게 한거야?"
이 세상에 태어난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느닷없이 울려대는 화재경보기가 사실은 오작동이었다는 것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다. 아이는 결국 "왜?"라는 질문을 수십 번은 되풀이 한 뒤에야 잠이 들었다. 사실은 의문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로 그저 지쳐 잠이 들었을 뿐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갑작스럽게 울려대는 시끄러운 저 소리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엄마가 화재경보기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그 소리가 도대체 왜 갑자기 울리는 것인지, 그리고 온 가족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한 소리가 이제는 아무소리가 아니였다고 괜찮다고 말하는 엄마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이미 공포라는 감정을 겪어버렸으니 말이다.
말을 배우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어른들과 똑같이 사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들을 지속적으로 아주 천천히 발달시켜 나간다. 그래서 바로 어제만 해도 해님이 왜 갑자기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지는지, 어두움이 서서히 찾아오면 왜 밖에 나갈 수 없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빠, 지금은 깜깜한 밤이 되서 밖에 가게 문들이 다 닫혔어."
우리는 어른들의 시선으로 생각하고 익숙한 결론들을 과학적인 논리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질문에답해주곤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똑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한다. 아이들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는 것은 부모가 열성적으로 답한 어른들의 논리가 아이의 논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은 부모의 대답이 자신을 이해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라는 질문을 지겹도록 하는 시기의 아이를 키우봤던 엄마들은 그런 어른들의 논리가 아이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몇번의 시행착오를 겪다보면 알게 된다.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아이의 "왜?"라는 질문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아이의 눈높이를 맞춘 경우에만 가능하다.
어느날, 우리 아이도 앞서 말한 책의 한 구절처럼 지난 밤에 봤던 달님이 아침에는 보이지 않자 눈을 뜨자마자 나에게 물었다.
"엄마, 달님이 왜 없어졌어?"
"응, 달님은 아침이 되면 보이지 않아. 대신 해님이 뜨지"
"왜?"
"음.........달님은 어제 규하가 코 잘때 밤새 일하느라 피곤해서 지금 코 자고 있대. 규하도 열심히 놀고나서 피곤하면 방에 가서 코 자잖아. 자고 일어나면 힘이 생겨서 다시 열심히 놀수 있고, 그치? 지금 눈에는 달님이 보이지 않지만, 저기 따듯한 구름을 덮고 달님은 코 자고 있는거야. 한 숨 푹자고 다시 힘이 생기면 규하 만나러 다시 나온대."
내가 우리 아이에게 달님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열성적으로 대답을 한다면 과연 아이는 자신의 궁금증을 얼마나 해소할 수 있을까?
아직 언어발달이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과 대화할 때 우리는 항상 아이들의 인지적인 측면 그리고 공감능력 등을 고려해보아야 한다. 엄마의 대답이 아무리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한 완벽한 대답이라고 할 지라도 아이의 수준에서 너무 어렵거나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이라면 아이들은 이내 흥미를 잃고 엄마와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직 어린 우리아이와 소통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바로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우리가 무릎을 꿇고 아이와 마주하는것이다. 아직 말이 터지지 않은 아이에게 엄마가 일방적인 대화를 시작할 때에도, 이제 막 입이 열린 아이와 조잘조잘 대화를 시작할 때에도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아이의 눈높이'이다.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단어가 아이의 눈높이에 적절한 단어인가? 더 쉬운 표현은 없을까? 아이의 논리로 지금 이 말이 이해 될 수 있을까? 엄마인 우리는 항상 아이의 언어수준과 인지적인 능력을 고려해서 아이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엄마가 아이의 눈높이를 맞출 때 비로소 엄마는 접속 버튼을 누르고 아이의 세상에 입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어린 우리아이에게는 '아이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