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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 엄마 Aug 22. 2020

'왜'라는 질문의 축복

'왜'를 넘기니 '그래도'가 왔다.

현재 우리 아이는 모든 대화를 '왜'로 해결하고 있다. 나는 규하를 통해 단 한 글자로 모든 대화가 이어지는 위력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왜'에 대한 사용 기준이 일반적이지 않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규하가 나와의 대화에서 '왜'라는 질문을 놓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엄마와의 대화를 이어가고픈 어떤 갈증으로 생긴 버릇이란 생각이 든다. 워낙에도 호기심이 많고 관찰형 아이이지만서도 어떤 때는 고개를 절로 흔들 정도로 지나친 경우가 많다. 지금도 사실 이런 아이의 패턴을 붙들고 고쳐주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지켜봐 주고 받아주어야 아이의 마음에 '안심'이라는 글자가 박힐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중이다.


어느 날은 아빠가 없는 틈을 타서 기계치인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을 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조르기 시작한 처음 순간부터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양한 어휘들을 바꿔가며 설명해주고 있었다.


'규하야, 컴퓨터나 전자 기계 같은 것들은 엄마가 고칠 수 없다고 했었지? 미안하지만 지금은 엄마가 고쳐줄 수 없어. 이따가 아빠가 오면 해달라고 하자.'
'왜 엄마는 못해?'

'응, 엄마는 그런 기기를 고치는 것을 한 번도 안 해봤어. 그래서 잘 몰라.'
'왜?'

'엄마가 한번 배워봤는데, 그래도 잘 못하겠더라고. 너무 어렵고 이해가 안 돼.'
'왜?'
....

왜라는 질문을 받기를 수십 번.
나는 아이를 붙잡고 눈을 마주 보게 고정시키고 목소리에 진지한 감정을 한껏 담아 말했다.

'규하야, 엄마도 잘하는 게 있고, 못하는 게 있어.'

그러자 골똘히 생각하던 아이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왜 그래?'




['왜'라는 질문의 축복]
 
아이가 의문사를 사용한 질문을 하려면 사용하고자 하는 의문사가 갖고 있는 개념을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 의문사 이해 능력은 만 2-3세에 활발하게 진행되며, 4-6세 사이에 육하원칙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의문사를 거의 안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의문사의 발달 순서는 '무엇(만 2;5세)->누구(만 2;11세)->어디(만 4;5세)->왜(만 4;5세)->어떻게(만 4;11세)->언제(만 4세 이후)'의 순으로 발달한다(이정미 & 권도하, 2005).

즉, '왜'라는 질문을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무엇, 누구, 어디, 어떻게'의 의문사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인지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 특히 '왜'는 상황을 추론할 수 있는 능력과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갖추어야 가능한 질문이다.

아이의 입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왜'라는 질문은 아이의 언어발달과 성장에 있어서는 축복이자 마중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는 아이의 내면에 담겨있는 언어의 샘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단어이자 아이의 지적 호기심이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마법 같은 단어인 것이다. '왜'라는 질문을 하려면 아이의 머릿속에서 이런 복잡한 작업들이 완성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부모가 알고 있다면 그래도 이 고된 시기를 버텨 낼 힘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규하는 '왜'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정보들을 모두 얻어내고 또 자신이 원하는 욕구도 다 채우고 나면 그제야 질문을 멈췄다. 지금은 좀 컸다고 자기가 생각해도 납득할 만한 대답을 제시해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주제로 넘어갈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단어 하나가 아이의 입에 맴돌고 있다.


'그래도...'


'왜'를 넘기니 '그래도'가 왔다. 소리 소문 없이.

나는 '그래도'라는 말이 상대방의 언어도 뛰어넘고, 모든 상황을 뒤집어 낼 수 있는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단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이들은 어떻게 이런 비상한 묘책들을 생각해내고야 마는 것일까.  


하루에 '그래도'라는 말을 백번은 들으니 어느새 내 입에서도 '그래도'가 다. 


그래, 그래도 너와 내가 성장하고 있음에 감사하자.


-Reference-
이정미 & 권도하(2005). 2-4세 아동의 의문사 이해에 관한 연구, 언어치료연구, 14, 한국언어치료학회, pp185-204.

그림출처: by 초록담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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