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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 엄마 Sep 03. 2020

언어에 실린 감정 배우기

아이에게는 좋은 말 나쁜 말이 없다.

아이들은 부모의 삶의 방식, 문화, 가치관 등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학습한다. 언어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언어스타일, 어휘력 모두를 흡수한다.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를 앵무새처럼 따라 하면서 언어를 배운다. 그것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말이다.


어느 날 규하가 혼자 놀면서 '아이씨!'라고 한 두 번 말하기 시작하더니 언젠가부터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끊이지 않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점차 그 말이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아이가 한두 번 말했을 때는 우연히 들었던 ABC송에서 유독 'C'가 기억이 남아서 그런 줄만 알았다. 처음부터 '아이씨'만 말한 게 아니라 앞뒤에 다양한 음절들이 따라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더 사용 빈도가 높아져만 갈수록 한 두 번 하다 말겠지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점점 그 말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아이를 붙잡고 장난처럼 말을 걸었다(이 상황이 아이로 하여금 혼나는 느낌이 들지 않기를 바랐다.).

"규하야, '아이씨'말고 '아이참' 이렇게 말하거나 '에이비씨'라고 해줘"

"왜?"

"그 말 말고도 다른 말들이 많으니까. 다르게 말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왜?"

"음..'아이씨'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듣는 사람이 기분이 안 좋아질 수가 있어."

"왜?(아이는 아직도 '왜'라는 말로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알고자 애쓴다.)"


순간, 지금 아이가 하고 있는 '아이씨'라는 말이 아이의 입장에서는 나쁜 말일까? 나쁜 감정을 실어서 하는 말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대화를 해보니 아이가 '아이씨'라고 말하는 것이 기분이 나쁜 상황에서 감정을 실어서 말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에게 화가 나서 혹은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예측 가능하게도 그 시작은 바로 나였다.

이때까지 나는 나 스스로 '아이씨'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아이씨'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그 단어에 예민해져 있던 어느 날, 아이가 다른 장난감에 몰입한 순간을 틈타 급히 집안 정리를 하다가 거실에 있던 정리함 모서리에 발가락이 찍힌 적이 있었다. 순식간에 발가락에서 살아나는 온갖 감각을 느끼며 고통에 몸부림칠 때 내 입에서 나온 외마디가 바로 '아이씨!'였다.

그제야 아이가 왜 '아이씨'라는 말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이는 내가 내뱉었던 그리 크지도 않았을 작은 속삭임까지도 흡수해서 어느새 아이의 일상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이 되었다. 아이는 아무 의미 없이 옹알이처럼 중얼거렸을 말을 훈육으로 잠재워야 하는 것일까. 자신이 내뱉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영문도 모른 채 혼이 나는 느낌을 갖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이가 내뱉는 언어에 어떤 감정이 실려 있는지는 설명해 줄 필요가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나 자신의 삶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든 언어를 흡수한다. 그것이 좋은 의미를 담은 예쁜 말이건, 좋지 않은 의미가 담긴 나쁜 말이건 말이다.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언뜻 들었던 비속어나 욕을 따라 말하거나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 부모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먼저는 아이가 자신이 하는 말의 뜻을 알고 사용하는 것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대부분 영유아의 어린아이들은 말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노래를 흥얼거리 듯 나쁜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부모가 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일관된 상황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언어에 담긴 감정을 읽어내는 경우가 많다.

아직 아이들이 언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기 전이라면 아이를 무작정 혼내기보다는 언어 속에 담긴 감정을 먼저 알려주어야 한다. 욕을 하는 아이를 보며 당황한 부모들이 아이를 무작정 혼내게 되면, 아이들은 자신이 왜 혼나는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장난처럼 말놀이를 즐기던 아이의 입장에서는(그것도 엄마 아빠 혹은 가까운 사람들이 한 말들을 무심코 따라 해 본 것뿐인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새로운 단어를 표현하는 것에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부모는 조심스럽게 아이들이 그 단어를 사용하는 그 순간에 즉각적으로 아이가 사용한 언어에 어떤 감정이 담겨있는 지를 차분히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가능한 아이가 이해하기 쉬운 단어를 사용해서 말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따로 있다.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기 전에 아이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은 단어가 있다면 부모의 입에서 그 단어를 먼저 '삭제'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모든 것은 부모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어재활사로 하루를 꼬박 보내던 3년 전의 나보다 아이를 키우는 지금, 나의 언어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피게 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언어에 대한 정의는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커갈수록 점점 더 부모의 미니미가 되어가는 아이는 어느새 나의 말투로 아빠와 대화를 하고 있다. 어떤 때는 내가 말한 문장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아빠에게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아이를 보고 있자니 단어 하나를 사용하더라도 좀 더 신중하게 된다. 이런 노력들이 쌓여 아이의 입에서 향기로운 말들이 쏟아져 나올 수만 있다면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의 말을 곱씹고 책임을 질 것이다. 말투는 아이에게 이렇다 할 물려줄 유산이 없는 내가 남겨줄 수 있는 소중한 자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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