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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관찰자 Jun 28. 2020

88번 버스는 네 번 오지 않았다.

수필


취하지는 않았다. 얼굴 가득 한기를 뿌리고 지나가는 봄의 밤바람은 그나마 있던 취기를 모두 날려버렸다. 지하철역 앞에 택시는 잔뜩 있건만 나를 태워줄 수 있는 차는 없는 것 같았다. 어느새 휴대폰 액정은 12시 5분을 알려주고 있었다. 차를 위해 세워둔 이정표를 따라 막연하게 걸으며 생각했다.


함께 술을 마셨던 거래처 사장은 동석한 자기 여직원의 허벅지를 왜 우리가 보는 앞에서 자꾸 쓰다듬었을까?나와 달리 거하게 취하셨던 직장 상사는 지금쯤 댁에 잘 도착이나 하셨을까?
평소 자는 시간에 비하면 그리 늦은 건 아닌데 이 약간의 술이 아침잠을 재촉 하지나 않을까?'


별 다를 것 없는 잡념 속에서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아무래도 무작정 걷기에는 꽤 멀어 보였고 택시를 잡기에는 돈이 아까웠다. 시간은 어느새 12시 2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660번이 집 앞에 가는 것을 확인한 후 낯선 사람들과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88번 버스가 도착했다. 함께 기다리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버스에 올라탔다. 660번의 막차시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간은 12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88번 버스가 왔다. 옆 동네인 문래동까지 가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 집 앞에 내려다 줄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다시 한번 보냈다. 시간은 어느새 12시 40분을 넘어섰다. 그동안 각기 다른 번호를 단 몇몇 버스들이 왔건만 난 여전히 660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류장에 남은 사람은 이제 나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88번 버스가 왔다. 12시 45분. 찰나였지만 나는 꽤 고민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다려보자는 마음을 먹을 때쯤 버스의 앞문은 취이~소리와 함께 닫히고 나를 두고 떠나갔다. 아득히 멀어져 가는 버스의 뒤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바라보았다. 진정 사소한 선택이었기에 미련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 이후 20분이 지나 1시를 넘어갈 때까지 버스는 단 한대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자주 오던 88번 버스도 길 건너 반대로 가는 차선에서만 보일 뿐이었다.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 인연도 이와 같노라고.


가진 것들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부끄러워하는 것에 더 익숙한 나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막연한 꿈에 도달한다는 것이 무척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런 나는 스스로 삶의 가치관이나 방식을 되새김질하고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기보다 치사한 욕심들, 부끄러운 게으름에 빠진 내 구김살 가득한 삶을 반듯하게 다려줄 사람, 지치고 병들고 찌들어버린 마음에 안식을 줄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렸다.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 당장의 코 앞 조차 잘 보이지 않는 어제에서 내일로 난 시커먼 길 위에 환하기는커녕 자꾸만 깜빡이는 그래서 언제 꺼질지 모르는 낡은 현실이란 전등을 들고 내가 꼭 원하는 그 사람이 멈추어주길 나는 기다렸다.


드물었지만 한 번씩 내 앞에 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와 똑같이 희미한 전등을 들고 많이 야윈 얼굴로 다가와 부끄러운 듯 시선은 자꾸만 발 밑을 향하던, 묵묵히 대답을 기다리던 사람들. 여인들. 그럴 때마다 나는 때로는 망설임도 없이 때로는 얼마 동안 고민을 하다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들은 내가 원하는 곳까지 나를 데려다줄 수 없노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오랜 기간만큼 외로움을 감내해야 했다. 버스를 모두 놓치고 쓸쓸히 집으로 걸어온 그 때처럼

진작 탔으면
 조금이라도 덜 걸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세 번을 보내버린 88번 버스의 뒤꽁무니가 자꾸만 떠오르던 밤길 나는 꽤 오래 걸어 2시가 다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꿈을 이루진 못했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은 내가 되었을 건데, 내 과거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놓쳤던 인연들을 생각하며 부질없는 후회를 해본다. 여전히 내 인생의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2009년 초봄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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