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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관찰자 Jun 29. 2020

나의 씀

수필

-1-

열한 살 때 일이다. 친척 어른을 만나 뵙고 용돈을 받아 돌아오는 길, 우리 삼형제는 오락실에 들렸다. 한참 게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아버지가 나타나셔서 불같이 화를 내시고는 우리를 집으로 끌고 오셨다. 아버지는 삼형제에게 반성문을 쓰라 명령하셨는데, 이제껏 아버지에게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던 벌이었다. 그러니 형들은 대충 써서 검사를 맡으러 갔지만 번번이 혼이 나고 처음부터 다시 쓰길 반복했다. 난 쓰다가 감정에 복받쳐 고작 공책 한 페이지를 채우며 눈물 한 바가지 쏟은 후에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반성문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글을 읽어 보시고는 아무런 말씀 없이 다시 텔레비전만 시청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등 뒤에 쪼그리고 앉아 언제 떨어질지 모를 불호령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귀가하신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내가 쓴 반성문을 툭 던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가 글 쓴 거 봐라.
 … 진짜 기가 막힌다.


컴퓨터 오락도, 딱지치기도, 싸움도 잘하지만 공부를 못해서 무시를 당하던 형들과 달리 나는 오직 공부 하나 잘한다는 이유로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어머니에게 난,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한글을 다섯 살 무렵에 스스로 뗀 그녀의 자랑거리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올 수'를 받아도 모자랄 통지서에 '우'와 '미'의 개수가 늘어나면서, 내가 공부도 그닥 잘하지 못하는 별 볼일 없는 녀석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 먼저 깨닫고 있었다. 그런 내게 그 날, 아버지의 그 무심했던 칭찬 한 마디는 재능이 말라 갈라진 밑바닥을 드러내던 '나'라는 논두렁에 실로 오랜만에 내리는 단비였다.


-2-

친구들보다 일찍 찾아온 사춘기는 고교 진학 후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남중을 거쳐 남고로 진학하며 이성에 대한 관심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러나 끝내 백칠십을 넘지 못한 키, 쇳소리가 섞인 하이톤 목소리, 코주부 얼굴은 나를 더욱 좌절케 했다. 그런 내가 외로움을 달래던 유일한 창구는 다름 아닌 펜팔. 그 당시 학교에서 단체로 받아보던 학습지에는 간간이 학생잡지가 딸려왔었다. 그 잡지 속에는 펜팔을 구한다는 각지 학생들의 짤막한 요청 글이 실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여학생들에게 장문에 손 편지를 보냈다. 다들 너도 나도 이메일을 만들던 시기였으니, 오히려 그런 촌스럽고 한물간 손 편지가 더 애틋했던 걸까? 나는 높은 확률로 답장을 받곤 했다. 그 당시 난, 내 글쓰기가 때로는 누군가의 마음을 혹하게 만드는 재주 정도는 된다는 것을 느꼈다. 


-3-

미니홈피 안 가진 사람이 드물던 시절, 서울 생활에 힘겹게 적응하던 나의 새로운 취미는 사진 촬영이었다. 5만 원 주고 구입한 중고 필름 카메라로 겁 없이 셔터를 누르고 다녔지만, 막상 비싼 돈 내고 인화한 결과물들은 구도와 초점이 맞지 않아 처참한 수준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못난 사진들과 부족한 실력을 나는 글로써 포장하기 시작했고, 별생각 없이 찍었던 사진마다 억지스러운 의미와 허세 가득한 문장을 가져다 붙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세 명도 채 안되던 미니홈피 방문자수가 아침부터 몇 만 명을 기록하고,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요동치던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이유를 알아보니, 전날 밤 쓴 글이 싸이월드 메인 페이지에 떡 하니 걸린 것이 아닌가. 고향에서 열린 가족 잔치가 끝나고, 적적해서 근처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찾아가 사진 몇 장 찍고 추억을 끄적거린 글이었다. 비록 다른 게시물의 수준은 함량 미달이라 방문자수는 금세 예전 수준으로 돌아갔지만,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것은 생전 처음 경험한 일이었고 난 한껏 고무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른 글이 한 번 더 메인 페이지에 오르자, 슬슬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을 최대한 과장하고, 예쁠 것도 없던 경험들을 번지르르하게 윤색했다. 그럼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자, 난 겪지 않은 일들을 그럴싸하게 지어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남의 글을 베껴서 조금만 수정하고는 내 글 인양 굴기 시작했다. 그나마 그 짓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은, 주목받기 바라는 마음보다 남들이 내 거짓과 위선을 알아채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끝내 나를 집어삼키고 난 뒤였다.


-4-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는 정말 행복했노라 말할 수 있는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남들은 이십 대를 떠나보낸 것이 마냥 섭섭했다던 서른 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던 때였다. 창문이 없어 햇볕 한 줌 쬘 수 없고, 내 몸뚱이 하나 뉘일 공간밖에 없던 월 15만 원 한 평짜리 고시원 인생이었지만, 일상의 순간에 반짝이는 작은 조각들을 모아 빛나는 미래가 새겨진 퍼즐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내 하루는 온전히 충만했다. 삼일 동안 곡기를 끊은 줄도 모르고 글을 썼던 스스로가 대견했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격려와 어여쁜 시샘만 들을 수 있던 날들. 입에 풀칠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던 20대를 통째로 바치고 얻은 시간과 기회 속에서 내 재능이 드디어 만개하고 있다 믿었고, 성공은 일말에 의심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서른일곱, 난 남들은 한 번쯤은 올라가 봤다던 공모전 최종심조차 도달하지 못한 채, 남의 작품을 헐뜯는 것만 잘하는 하이에나가 되어있었다. 허기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글을 쓰던 열정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하루를 또 헛되이 보냈다는 후회로 잠 못 드는 날들만 이어졌다. 사람들은 이제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보다, 방송가에 추접한 뒷얘기가 얼마나 업데이트되었는지만 물었다. 함께 길을 출발했던 동료들이 하나 둘 그 길에서 내려와 평범한 직장인으로 변절할 때마다 가장 열심히 손가락질했건만, 사실 그들이 너무나도 부러웠음을 스스로 시인하고 나서야, 작가 되기를 포기할 수 있었다. 찬란하다 믿었던 내 재능이 이 바닥에서는 흔해빠진 것임을 인정하기까지 무려 8년이 걸린 것이다. 그런 내게 남은 건 자신에 대한 지독한 혐오뿐,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5-

구로에서 남양주로 이사 오면서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모임과 거리상으로 참여가 어려울 것 같은 모임들을 정리했다. 고양이 집사 모임, 사진모임, 운동모임 등등 하나 둘 탈퇴하다 보니 격주마다 참석하는 독서모임 하나만 덜렁 남았다. 좀 썰렁하다 싶어 가입할 만한 동호회를 한참 알아보다 글쓰기 모임에 가입했다. 그런데 평일 모임은 금요일밖에 없다. 불금에 글쓰기 모임이라니, 이때 참석한 사람들은 도 닦는 사람들일까 싶었다. 거기다 장소가 노원이다. 서울 생활 13년 동안 가본 적이 없는 동네. 그냥 탈퇴할까 하려다 그나마 글을 미리 쓰는 타입이라고 하니 참석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안 쓰던 글을 다시 쓰려니 머리가 전혀 돌지 않았다. '글감은 만드는 게 아니라 찾아오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모임 당일이 되어서도 못썼다. 

모임으로 가는 길, 부랴부랴 수정하기 시작했다. 맞춤법은 포기했다. 대충 써도 모를 거다. 설마 국문과 출신이 있을까 싶었다.(이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모인 6명 중 2명이 국문과 출신이었다.) 늦는 거 질색인데 첫 참여부터 5분 지각이다. 내 잘못인데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도착했더니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모르겠다. 하필 이런 데다 모임을 잡았을까. 내 뒤에 서서 문 열기를 기다리는 학생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입에서 욕이 아른아른거릴 때 서글서글하게 잘생긴 놈 하나가 웃으면서 문 열어준다. 그 날 모임의 주최자였던 이경환씨였다.


그것이 나와 글쓰기 모임 '사각사각'과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나는 삼십 대 마지막 겨울을 온전히 그들과 함께 보냈다. 내 글과 내 감상을 좋아해 주는 착한 사람들과 정다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들 덕분에 나는 쉬이 용서할 수 없었던 2년 전에 나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게 다시 글을 쓰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지금의 내 대답은 “아니다.”

누군가가 내게 다시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지금의 내 대답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라고 답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들을 만나러 간다.


2020년 5월 15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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