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버지는 다 핀 공초를 말아 쥐셨다.
"나도 금방 왔어."
"그럼 한 대 더 피실래예?"
"… 그르까?"
"한 대 더 피시소.
저는 저짝가가 한 대 필께예."
담배를 피우고 나니 어느새 아버지는 사라지셨다. 또 아버지는 나를 두고 먼저 자리를 뜨셨다.
진료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전화했더니 느긋하게 받으시고는 "니 때매 커피도 한 잔 못 묵겠다" 하며 농을 치셨다.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경부선 터미널 입구에서였다.
"간다고 하면 말을 하셔야지
와 먼저 가서 사람 찾게 합니까?"
내 볼멘소리에 아버지는 배시시 웃으며
"와? 니 삐졌나?"
"아니라예."
오늘은 지난주에 찍은 CT와 뼈 검사의 결과를 듣는 날이다. 한 달에 한 번 해오던 거지만 아버지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신 짓궂은 농을 던지셨다.
"우리 아버지가 와 이리 업되셨을까?"
"푸하하. 내 진짜 많이 좋아졌다"
아버지는 검사 결과를 장담하셨다. 이제는 육교도 쉬지 않고 건넌다며 기뻐하셨다. 나도 오늘은 늦지 않게 마중 나왔고, 타이밍만 맞으면 금세 병원 일정이 끝날 것 같았다. 그러면 아버지는 가장 빠른 시간에 버스를 타실 거고 나도 집에 두고 온 고양이 걱정을 덜 할 것이다. 담배를 한 대 더 피시는 아버지를 두고 나는 진료예약에 검사 결과 출력 신청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마침 진료예약시간도 딱 맞아서 금세 우리 차례가 왔다. 여러모로 잘 풀리는 날이었다.
"더 안 좋아지셨습니다."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던 의사의 첫마디였다. 약을 탈 수도 없다고 했다. 남은 건 입원 치료밖에 없다는 말에 우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시한부 판정 후 1년, 좋은 결과를 장담했던 아버지에게 의사는 지금 이제 당신은 약도 못 쓸 정도라고 통보한 것이다. 아버지는 검사 때만 잠깐 안 좋았다고 항변했지만 의사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입원을 미루고 돌아가는 길, 아버지는 믿기지 않는 듯 연신 고개를 저으셨다. 약도 없는 병,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신세, 그 모진 현실에 아버지와 아들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경주행 버스표를 끊으며 나는 앞자리로 달라고 했다. 옥수수물을 하나 샀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자식으로서의 무력감과 자괴감이 들어오고 나가는 버스처럼 밀려왔다 빠져나간다.
아버지를 태운 버스를 떠나보내고 나는 멍하니 담배만 피워댔다. 샌들을 오랜만에 신어서인지 엄지발가락이 아프다. 내 인생의 엄지발가락 같은 사람도 지금 많이 아프다. 마음은 더 아플 것이다. 서울에서 경주로 가는 세 시간 반 동안 어떤 생각들이 당신을 스쳐갈까. 나는 당신의 그 상념들에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쉽게 잠들지 못할 당신의 세 시간 반이 내게는 너무나 간절하게 다가왔다.
당신은 죽음조차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오늘 나는 당연한 시간의 흐름이 유독 버겁게만 느껴진다.
2017년 여름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