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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관찰자 Jun 28. 2020

종이에 베이다

수필

교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테이블은 깨끗한지, 물건은 빠진 것이 없는지 이리저리 살펴보다 담배 한 종류가 애매하게 비어 있었다. 채워도 되고 채워도 되지 않을 정도의 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그냥 채우기로 하고 새 담배 한 보로를 꺼내어 비닐을 뜯기 시작했다. 쉽게 뜯으려고 보로곽을 세로로 세우고 양손으로 비닐을 벗기는데, 순간 손가락에 단발의 고통이 스쳤다. 두껍고 빳빳한 보로곽 종이가 내 살을 꽤나 깊게 파고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닦아도 피가 그치지 않았다. 또 무척이나 쓰라렸다. 티슈를 붉게 물들이는 손가락을 멍하니 보다 담배 보로곽을 살폈다. 


베이기 전 몇 개나 똑같은 방법으로 비닐을 벗겼다. 하루 종일 서있는 것에 비하면 힘도 들지 않고 버튼 한 번 잘못 누르면 내 돈을 박아야 하는 복권 출력보다도 간단한 일, 무거운 물건들을 나르고 일일이 체크하는 일에 비하면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일. 그런 만만한 일에 다쳐서인지 더 아팠다. 그러다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을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그들을 떠올렸다.


내 명령이면 무조건 복종하던 군대 후임, 내가 하자는 거라면 군말 없이 따르던 그녀, 내 부탁이면 거절할 줄 몰랐던 그 친구, 내 짓궂은 농과 무례한 행동들을 언제나 무던히 넘기던 사람들이어서 갑작스러운 그들의 정색은 더 의외였고 또 혼란스러웠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고 또 미웠다.


보로곽 종이는 새 것이라 무척 부드러웠고 그만큼 빳빳했다. 나는 그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잠시 잊었다. 그래서 하찮은 일로 치부했고 방심했다. 그러다 다쳤고 급한 대로 밴드를 사서 붙였다. 멈출 줄 모르던 피도, 쓰라린 통증도 얼마 안 가 멎었다.


그들은 참 착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만큼 예민한 이들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잊었다.

그래서 무시했고 내 맘대로 행동했다. 그러다 다퉜고 홧김에 인연을 끊어버렸다. 아픔도 괴로움도 얼마 안 가 잊혔다.


부럽고, 낯설고 어려워하던 사람들 앞에선 그만큼 조심했다. 그러나 별 다를 것 없고, 편하고 쉽던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함부로 대했던가. 좁은 고시원 골방, 선풍기가 뿜어내는 뜨뜻미지근한 바람 때문일까? 이제야 뒤늦은 죄책감과 미안함이 들어서일까? 낯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밴드 속 상처는 며칠 후면 아물 것이다. 새살은 다시 돋을 것이다. 기억 속 내 상처는 며칠 후면 가물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은 언제쯤 지워질 수 있을까? 세월은 밴드가 될 수 없다.


2008년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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