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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관찰자 Jun 27. 2020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수필

빨래가 다 끝나갈 때 쯤 빨래통에서 미처 빠뜨린 양말 한 짝을 발견했을 때, 샤워를 하다 아무렇게나 틀어둔 음악에 꽂혀 흥얼거릴 때, 며칠 전에 해둔 나물 반찬들이 상할까 양푼이에 모두 담아 쓱쓱 비빌 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갈 때, 세월은 진정 모두 잊어버렸냐며 슬쩍 두고 가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여자 아이들이 1년 내내 바지만 입던 그 시절, 그 날 따라 넌 눈부신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왔었지. 어쩌면 그 날이 너에겐 어떤 특별한 날이었을지 몰라. 언제나 네게 못되게 굴던 난 또 심술을 부렸지만, 너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대꾸 없이 웃기만 했어. 그런 착한 너에게 난 왜 그리 모진 말을 뱉었을까? 넌 끝내 책상에 엎드려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지.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서러움에 떨던 너의 가냘픈 등과 예쁘게 묶은 단발머리가 아직도 눈에 선해. 그 시절 너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이 있어.


성적은 떨어지고, 가족들은 무관심했지. 가장 가까웠던 친구는 널 두고 다른 무리로 가버렸고 네 맘을 털어놓을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어. 그토록 외로운 너를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울렸지만, 넌 투정하는 법을 몰랐어. 그런 예쁜 너에게 난 왜 그리 비겁한 이별을 통보했을까? 겨울이 미처 떠나지 못해 유난히 쌀쌀했던 그 봄밤, 공중전화 수화기 너머 들리던 너의 애처로운 외침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아. 그 계절 너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이 있어.


부위도 원산지도 알 길 없는 정체 모를 돼지고기를 굽던 내게, 당신은 큼지막한 유리병을 내밀었죠. 몸에 참 좋은 거라며, 날 위해 특별히 구했다는 그 병 속 새까만 즙은 뚜껑을 여는 순간, 나의 비위를 자극했어요. 한 모금 삼키기도 곤욕이라 난 금세 손사래를 치며 당신에게 투정과 짜증을 부렸지요. 한 입만 더 먹어보라던 당신의 부탁을 난 왜 끝내 거절했던가요? 얼마 후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던 당신의 집을 정리할 때, 냉장고 속 상한 음식들을 버리는 것은 막내인 제 몫이었어요. 역한 냄새에 인상을 써가며 그 많은 것들을 몽땅 버려버리고 나서야 그 속에 당신이 오직 날 위해 장만한 그 즙이 있음을 깨달았어요. 개수대에서 옅어지던 그 구수한 냄새가 지금도 코 끝을 간지럽혀요. 아버지, 그 날 당신께 차마 전하지 못했던 말이 있어요.


미안해요.

이 사소한 한 마디를 왜 당신들이 내 곁을 영영 떠나고 나서야 할 수 있었을까요? 홀로 남겨진 외로운 양말 한 짝을 보다가, 뜬금없이 날 호젓하게 만드는 음악을 듣다가, 아무렇게나 비빈 밥을 먹다가, 청승맞은 죄책감에 빠져버린 걸까요? 세월은 대체 언제까지 날 이토록 부끄럽게 만들고 마는 걸까요?


2020년 6월 27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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