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19년 7월 3일
병원에서 퇴원한지 10일째, 아직까지 집에서 요양 중이다. 사장님은 2주간의 요양 휴가를 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줄 수 있는 배려는 여기까지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땐 나도 어쩔 수 없어.
병을 치료한다는 이유로 한달 새에 일년 치 연차를 모두 소진하고 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나로서는 응당 받아야 할 통보였다. 동료들은 때마침 늘어난 업무를 버겁게 감당하면서도, 앓는 소리 없이 나를 먼저 걱정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그런 배려에도 내 건강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병의 가장 큰 원인인 담배를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십 대 내내 파견직으로 떠돌다 겨우 구한 정규직 자리인데, 이제 해고될 처지에 놓였음에도 스스로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더 잃어야 정신을 차릴까?
오늘 낮엔 보험사정인이 왔다.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며 며칠 전 일방적으로 해지통보를 한 보험사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그에게 내가 지금 얼마나 막막한 처지인지, 그 보험금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호소했다. 내 초라한 사정을 모두 듣고서 그는 애써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그가 지하 주차장 입구 아래로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내 행동이 헛된 짓이었음을 깨달았다. 보험금을 주지 않을 이유를 찾으러 온 사람에게 보험금을 받아야 하는 사정을 구차하게 설명한 것이다.
내일 고향에 갈 버스 티켓을 예매하고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또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그녀는 내일 내려간다는 용건을 듣고서야 안심했다. 그리고는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이렇게 말했다.
“혹시나 … 난 또 ….”
2주전 내가 마지막 응급실 신세를 진 이후, 그 때부터 엄마는 내 전화를 이렇게 깜짝 놀라며 받는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세 번의 입원을 하면서, 난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했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졌으며, 엄마의 가장 큰 걱정거리가 되고 말았다. 고작 담배 한 모금에 또 다시 제멋대로 뛰기 시작한 심장이 시시각각 날 불안하게 만든다. 당장 내일 아침에 멀쩡하게 눈 뜰 수 있을지 조차 확신할 수 없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이런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다.
2015년 7월 초
방송국 기술직 공채시험을 준비하는 요즘, 나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 앞에 속절없이 헤매고 있다. 5년 동안 꿈꿨던 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나름 절박하게 시작한 일인데 고작 이런 일에 주저 앉는 것이 수치스럽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번번이 내 앞을 가로막았던 녀석이라 이젠 내 인생의 천적처럼 느껴지고 몸서리가 쳐진다. 날 이토록 힘들게 하는 존재는 다름아닌 ‘수학’이다.
중학교 2학년, 그 시절 내가 학교에서 하는 것은 온종일 짤짤이뿐이었다. 요령이 없어 언제나 돈을 잃으면서도, 성적이 어느새 바닥을 쳐도 그 땐 내게 그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수학 시험에서 최악의 성적을 받고서, 방과 후 나머지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는 공부 좀 했다는 소리를 들었던 놈인데, 반을 대표하는 농땡이들하고 같은 취급을 받으니 영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나름 집중하려고 애써봤지만, 한 시간 내내 선생님의 설명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다 수업이 끝날 무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앉아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제 내 인생에 수학은 없다.
그렇게 나는 15살에 수학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그 때에 섣부른 결심은 이후 두고 두고 내 발목을 잡았다. 고교 진학을 위한 배치고사, 고등학교 수능시험, 대학교 회계 수업까지. 수학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또다시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회로 이론 속 대학 수학이 버거워 고교 수학을 공부했지만 그마저도 감당할 수 없어, 지금은 한가롭게 중학 수학을 풀고 자빠졌다. 시험일이 몇 달 남지도 않았건만 이렇게 중학교 2학년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어쩌면 수학을 포기했던 20년 전 그 당시의 문제를 푼다면, 이후에 문제들도 술술 풀지 모른다는 막연한 주술적 믿음은 아닐런지..
어쩌면 이런 어리석은 행동이 내가 진정 간절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왜 나는 작가 되기를 포기했었나. 재능도 바닥이 드러났으면서, 꾸준함마저 잃어버렸으니까. 자료 조사 한답시고 인터넷서핑으로 허무하게 날려버린 날들이 아까웠으니까.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지긋지긋했으니까. 20대 중반에 방송국 공채를 통과해 7년만에 아파트도 사고 외제차도 뽑았다던, 나보다 세 살 어린 박감독을 보며 나도 10년 후에는 그렇게 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왜 한낱 수학 따위에 이렇게 쩔쩔매고 있을까? 스스로에게 화가 나 견딜 수가 없다.
2010년 7월
직장을 그만두고 진정 원하는 일을 찾아 나선지 넉 달 째. 가장 먼저 도전했던 만화 그리기를 포기하고 얼마 전 두 번째로 시작한 일이 드라마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행동 없이 고민만 하고 있던 어느 날, 한 친구의 격려를 받아 호기롭게 뛰어들었지만, 교육원에 3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내고 나니 괜히 했나 싶어 겁이 났다. 거기다 얼마 전 어금니에 임플란트를 박으면서 2년간 저축한 돈 대부분이 사라지니 허탈함도 느꼈다. 한 평짜리 월 15만원 고시원에 살면서, 직장이랑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악착같이 모아둔 돈이었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어떤 날은 막연한 두려움에 떨었던 것 같다. 직업도 없이 하루 종일 방에 누워있는 앞 방 아저씨처럼, 가난하게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러나 나는 창문 하나 없는 그 후덥지근한 골방에 누워 그런 생각도 했을 것이다.
‘벌써부터 경제적인 두려움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입에 풀칠하겠다고 아등바등 살아온 이십 대를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는 오로지 내 욕망에 충실하며 살아야 한다. 나는 꿈을 찾을 것이며 그 것을 이루고 말 것이다.’
그런 걱정과 희망들의 끝없는 교차 속에서 한참을 잠 못 이루다 복도에 나와 담배 한 대 피우며 그런 다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내 인생은 지금부터라고.
2000년 여름
나는 지금 경상북도 청송의 어느 산 중턱 고추밭, 그 밭 한 구석에 놓인 넓은 바위 위에 누워 마냥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스무살의 눈부신 여름을 난 왜 이 지루하고 심심한 곳에서 보내고 있을까?
2시간 내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던 5월의 어느 회계 수업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았다. 부모님이 빚을 내어 어렵게 마련해준 입학금과 등록금 생각에 간신히 버텼건만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학교에도 학과에도 끝내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한심한 룸펜이 되고 말았다.
그런 나를 이 곳에 데려온 이는 제대를 몇 달 앞두고 휴가 나온 큰 형이었다. 얼마 전 귀농한 아버지를 뵙기 위해 이 곳에 잠시 들른 그는, 몇 일 후 나를 두고 군대로 복귀해버렸다. 그렇게 이 곳에 덩그러니 남은 나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농사일을 돕고 있다. 그러나 어느새 50대가 된 아버지보다도 힘이 딸렸고, 연로하신 70대 할머니보다 빨리 지쳤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낙오를 하자, 아버지도 언제부턴가 자는 척 하는 나를 내버려 두고 밭에 가기 일쑤였다. 컴퓨터도 없고 전화도 안 터지는 이 산골짜기에, 내가 있어야만 한다고 그 누구도 강요한 적 없다. 단지 떠날 이유를 찾지 못해 머물러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고작 그런 존재인 것이다.
요기 있던 구름이 어느새 저만치 갔다.
하늘이 참 더럽게 푸르다.
낮잠이나 한 숨 더 자야겠다.
PS … 2020년 7월 3일
모임을 파하고 나왔더니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모두들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으니 적절한 시간에 끝난 것이다. 목적지처럼 가야 할 정류장도 제각기 달라 우리는 금세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책을 읽다 이런 구절을 보았다.
- 삶의 질이라는 것의 실체는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 혹은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느끼는가 이다 <몰입 Flow 중에서>
잠시 책을 덮고 오늘 내게 일어난 일과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같은 글쓰기모임이지만 금요일모임은 주말모임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주말 모임이 느긋한 휴일, 편안한 시간에 즐기는 여유로운 여가활동이라면, 금요일 모임은 기다리던 주말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관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제출할 글도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한 과제 같아서 좀 더 공을 들이고 다듬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고도 늘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마감한 글을 단톡방에 공유하고 나는 그 문 앞으로 달려간다. 오늘도 이전과 다를 바 하나 없었다.
어제 밤부터 끙끙대며 쓴 글을 오늘 내내 다듬고, 외출 준비 전 모임 단톡방에 업로드 했다. 모임 장소로 가는 길에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못난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다. 보내기 전에는 기가 막히게 숨어있던 오타가 왜 이제야 눈에 띄는 것일까? 형식이나 구조에 치중하다 보니 글 자체의 미(美)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진실만 담아야 한다는 아집이 타인에게 공감을 주어야 할 수필을, 혼자만 알아먹을 수 있는 일기로 만들고 말았다. 이리도 못난 글을 또 남들 앞에 내놓았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내 글에 모임회원들은 언제나 과분한 칭찬으로 화답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깊이 공감해주고, 공들여 쓴 문장은 지나치는 법 없이 콕 집어 참 좋았노라 말해주는 마음씨 좋은 사람들. 냉정한 비판과 치열한 토론 대신 따뜻한 격려와 훈훈한 소감만이 가득한 자리. 지친 몸을 이끌고 금요일 밤 8시에 모인 우리는 그렇게 진심 어린 칭찬과 악의 없는 농담에 웃고 떠들며 그간 쌓인 긴장과 피로를 풀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늘 내게 일어난 일과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떠올려 보니, 내가 좋은 사람들과 참으로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알 수 없는 충만함으로 가득 찬 지금 나는 감히 행복하다고 말해본다. 오늘은 집 앞에서 옛날 통닭이랑 맥주 하나를 사야겠다.
2020년 7월 3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