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정욱씨를 처음 만난 건 작년 겨울, 모임의 송년회 자리에서였다. 신참내기 주제에 꽤나 늦게 도착했던 나는, 운영진이 배정해준 자리에 허둥지둥 앉았다. 온통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마냥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내 왼편에 앉아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네던 사람, 그가 바로 정욱씨였다.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우리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많을수록 입을 다무는 내 버릇과 차분하고 낯을 가리던 그의 성격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다 운영진이 준비한 게임이 시작되기 전 그가 테이블 아래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따스해 보이는 겨울 양말이었다. 그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면서도 그는 생색내지 않았고, 모두에게 줄 수 없음에 미안해했다. 그런 서분서분한 정욱씨가 나는 마음에 들었고 모임 다음 날 단톡방에 그가 준 양말을 신고 인증 사진을 올렸다.
정욱씨를 다시 만난 건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뀐 후 지난 금요일 모임에서였다. 이제는 터줏대감 소리를 듣게 된 나는 낯익은 사람들과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만큼은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가 잠깐 마스크를 들었을 때 비로소 정욱씨임을 알아챘다. 그 선한 인상이 이 슬픈 시절 중에서도 그대로여서 더 반가웠다. 얼마 후 모두 모여 저마다 써온 글을 소개하고 따뜻한 격려와 소감을 듣는 시간, 정욱씨의 차례가 왔다.
나는 초중고 장래희망에 시인이나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적었지만 수능성적 미달로 원하는 대학, 학과를 가지 못하고 점수에 맞춰 갔다. 대학에 가서는 중고딩 때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졸업 후 취업을 하고 몇 년간의 경력이 쌓였지만 프로답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이 싫었고 주위 사람들도 나를 프로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몇 년의 방황 끝에 안경계에서 프로가 되기로 진로를 바꿨다. 이번 결정에도 주위 어른들의 추천이 있었고 내가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알아야 했다. 안경광학과 3학년에 편입하기 전, 짧은 기간이었지만 안경테 회사에서 알바도 해보고 남대문시장 안경원에서 수입 안경테 판매도 해봤다.
안경사라는 옷에 내가 본래 꿈꾸던 시인의 옷을 겹쳐 입어 봤다. 두 가지 옷을 한 번에 입은 거지만 얼추 폼이 좋아 보였다. 시라는 내 마음속 거울에 대보기도 하고,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미래를 예상해봤다. 내 나름대로는 괜찮아 보였고 이대로 현재를 진행해도 될 거 같아 보였다.
- 조정욱 <또렷한 내 인생아> 중에서 –
나는 그의 글이 참 좋았다. 자신의 좌절을 변명하지도 포장하지도 않는 그 솔직함에 끌렸다. 그는 방황 끝에 선택한 직업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랜 시간 간직한 꿈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최선을 다해 현실을 살고 있었으나, 코로나로 녹록하지 않은 자신의 상황을 덤덤하게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이미 선택했으니 최선을 다해야지요.
그 ‘무덤덤함’이 어쩜 그리도 멋있던지
늦은 시간까진 이어진 모임은 늘 그렇듯 우리 모두에게 만족감을 안기며 끝이 났다. 모임 막바지에 거친 소리와 함께 쏟아지던 소나기도 우리가 문 밖을 나서자 마법처럼 그쳤다. 소중한 이들과 함께한 7월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선선하고 아늑하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사람들과 작별한 후 뿌듯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지하철에 올랐다. 갈아탈 버스를 기다리면서는 단골 통닭집에 전화를 걸어 통닭 한 마리도 주문했다. 마침 금요일이니까 맥주도 한 두어 개 마시며 주말을 맞이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렇게 버스 안에서 일요일 독서모임에서 토론할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어디쯤 왔을까 싶어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니 차창에 물기 어린 생채기들이 어지러이 맺혀 있었다.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류장에 내렸을 때는 이미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벼락이 떨어졌다. 나는 번쩍이는 하늘을 한동안 원망스레 바라보다 허겁지겁 통닭집으로 달렸다. 마음씨 좋은 통닭집 아저씨가 빌려준 우산 덕분에 물에 젖은 새앙쥐 꼴은 면할 수 있었지만 이미 통닭은 식을 대로 식어 있었다. 집에 돌아와 얼른 씻은 뒤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그때 모임 단톡방에 정욱씨의 메시지가 떴다. 자신에게 찾아오면 안경을 20% 할인해주겠다는 그의 영업용 멘트에 나는 놀란 듯한 답장을 남겼다. 그리고는 어떤 이모티콘을 보내줄까 이리저리 찾다 마침 적당한 것을 골랐을 때 다시 한번 그의 메시지가 떴다.
코로나 때문에 안경원 매출도 떨어졌지만
제 개인 판매액도 심각해서
진짜 이번에 안면 몰수하고
모임에 지인 찬스 요청해봅니다.
안경 쓰신 분들은 필히!
따로 연락 주시고 방문해주세요
그의 그런 진지한 부탁에 나는 이모티콘 전송을 멈추었다. 대신 “넵”이라고 짧게 대답한 뒤 내가 해줄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을 생각해보았다. 안경은 자전거를 타다가 잃어버린 후 집 앞 안경점에서 새롭게 맞춘 것이 불과 몇 달 전 일이다. 렌즈는 20대 때 비싼 돈 들여 맞추었지만 영 불편해서 한 두 번 쓰다 버렸었기에 지금도 거부감이 있다. 선글라스는 하루에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는 내게는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니다. 아무도 듣지 않을 변명들을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다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한 난, 아직 취하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 결국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나는 두 달 전 직장을 잃었다.
코로나에 직격탄을 맞은 대기업은 서둘러 사업을 정리했고, 한낱 협력업체 직원에 불과했던 나도 당연한 수순처럼 일터에서 쫓겨났다. 두둑한 연말 보너스에 기뻐하며 2020년은 더 파이팅해보자고 다짐한 지 불과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렇게 백수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평소대로 일어나, 밥을 차려 먹고, 깨끗이 씻은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일과를 준비했다. 출근 시간은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것으로 대신했고 오전 9시가 되면 책상 앞에 앉아 정해둔 일을 시작해 오후 6시까지 매진했다. 집에서 삼시 세 끼를 다 먹어도 결코 설거지를 미루는 법이 없었고 저녁에는 싱크대 배수구까지 박박 닦은 뒤 샤워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여가를 즐겼다.
난 그랬다.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통장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보다, 무기력에 빠지는 것이 더 두려웠다. 고작 일자리 하나 잃었을 뿐인데,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싫었다. 내가 잘린 건 코로나 때문이지 내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열심히 준비하고 기다리면 기회는 반드시 다시 올 테니까, 타인이 집단이 사회가 나를 낙오자라 낙인찍어도 내가 나를 놓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 예전으로 … 돌아갈… 수 …
모임에 참석했던 그 날 아침, 나는 처음으로 설거지를 미루었다. 오전 내내 핸드폰에 빠져 있다가 점심 무렵 배가 고파 일어났더니 아침에 사용한 그릇들이 싱크대에 그대로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식사도 잊은 채 설거지를 하고, 싱크대 주변을 닦기 시작했다. 그랬다. 언제부턴가 나는 평소보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그러고도 낮잠을 쫓지 못해 꾸벅꾸벅 조는 날이 많아졌다. 당장 해야 할 일 대신 엉뚱한 짓으로 일과를 보냈으며, 아무런 쓸모도 의미도 없는 행동을 여가활동이랍시고 즐겼다.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무기력에 난 어느새 잠식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정욱씨의 메시지에 펑펑 울어버렸다. 그의 거침없는 절박함 앞에 통닭과 맥주를 자랑스레 사 들고 온 것이 민망해서, 고작 두 달을 버티지 못한 각오와 다짐들이 허망해서, 그러면서도 안경 하나 해줄 수 없는 처지가 창피해서. 그동안 엄마의 걱정에도, 친구들의 물음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사는 척했었다. 그렇게 척만 했어야 했는데, 그러면서 뒤에서는 더 치열했어야 했는데, 결국 나는 가장 먼저 나를 속이고 말았다. 그러다 정욱씨의 그 안면 몰수한 메시지에 스스로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한 바탕 울고 나서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 못난 글을 하루가 가도록 붙잡고 끙끙 앓았다. 직장에서 잘린 것이, 게을러진 것이, 펑펑 운 것이 망신스러워 몇 번이나 쓰지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나는 이 글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정욱씨가 그랬듯 나도 좌절을 외면하지 않고, 더 절박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 그런 계기를 준 그에게 이렇게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글을 공개했다는 것은 정욱씨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사연을 이런 부족한 글에 싣게 해 준 그의 넓은 아량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늦은 장마 때문에 창 밖은 하루 종일 흐리다. 이젠 그쳤겠지 싶으면 비는 또다시 떨어진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내릴 것이라고 했다. 나의 마음 속 먹구름도 금방 걷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창 밖을 바라보며 외쳐본다.
또렷해져라! 내 인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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