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인칭관찰자 Aug 17. 2020

그대 아직 빛나고 있는가

수필

(그 회사에) 가게 된다면,
저 불빛들 중 하나를 책임지게.
 한 명 한 명의 불빛이 모여
...
웹툰 <미생>  착수 1 中  후원인이 장그래에게



 회사가 그 유명한 L타워로 이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2년 전 늦가을 무렵이었다. 소문은 금세 사무실 천장과 파티션 사이를 유령처럼 떠돌았고, 누군가는 섣부른 기대에 부풀었으며, 누군가는 이면에 불길한 무언가를 조심스레 예측했다. 그러나 L타워를 가본 적이 없던 난 그 이전이 어떤 의미인지, 그 안에서의 생활은 얼마나 다른지 가늠조차 못했다. 더군다나 나는 협력업체 직원에 불과했으니, 그곳을 직장이라 부르기도 적잖이 꺼림칙했다. 그래서 그때까지 누가 물을 때마다 굳이 일터라는 단어를 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밤, 매서운 겨울바람에 잔뜩 웅크리고서 종종걸음으로 퇴근하다, 지하철역 출입구 앞에 서서 길 건너 L타워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지상 123층, 연면적 42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고 세계에서도 한 손에 꼽힌다는 그 거대한 마천루는 하늘 끝에 금방이라도 닿을 듯 솟아올라, 층마다 빼곡히 박힌 전등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지상에 환한 불빛은 지구 밖에서도 볼 수 있다던데, 저 웅장한 건물 속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빛을 발산하고, 그 빛이 하나 둘 모여 머나먼 우주에서도 빛난다 생각하니 순간 뭉클해졌다. 그래서 다짐했다. 저곳에 가게 된다면, 나 역시 내게 주어진 빛을 책임지겠노라고.     






 이삿날은 그 해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회사 짐을 챙기려 연휴 아침부터 출근한 나는 새 근무지에 들어서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높다란 천장과 널찍한 복도, 광택을 머금은 대리석 바닥과 반짝이는 샹들리에, 집기 하나하나 손때 묻지 않은 새것 그대로였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명품이라 적힌 마크가 꼭 하나씩 붙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막상 우리들의 업무 공간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란. 


통로 한 편에 통유리로 둘러싸인 고시원 쪽방만한 그 공간에는 냉난방 장치는커녕, 흔한 창문 하나 없었다. 옷걸이나 수납장을 두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개인물품을 보관할 캐비닛은 엉뚱하게도 다른 팀 사무실 구석에 배정받았다. 협력업체 직원들이라고 정말 찬밥 제대로 먹는다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높은 임대료 때문에 그동안 누렸던 복지들이 점차 줄어든 것이다. 이사 후 첫 출근 날, 아침마다 로비에서 무상으로 제공되던 빵과 우유를 평소처럼 집으려는데, 총무과 여직원이 내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만 먹을 수 있어요!     


모호하게만 들리던 그 ‘우리’의 범위를 굳이 되물어, 내가 객식구라는 씁쓸한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돌아섰다. 그러다 얼마 후 점심마저 지급이 중단되자, 나와 동료들은 심각하게 이직을 논의했다. 빵, 우유와 달리 점심은 당장 생활비와 직결된 문제였다. 그래서 이 회사에 처음 왔을 때, 우리의 복지를 담당했던 S과장은 점심을 공짜로 준다는 것을 유독 강조하지 않았던가. 결국, 그마저도 사라지고 L타워는 내게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내 서글픈 처지와 상관없이 L타워는 랜드 마크로써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백화점과 놀이동산, 지하철역과 전망대, 쇼핑몰과 극장이 하나로 연결된 그 드넓은 공간으로 사람들은 끝없이 흘러와 부딪히고 흩어졌다. 벤치와 기둥에 밀물처럼 밀려들어 새겨지던 약속, 출구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기약된 다음, 흔적이 남은 곳에는 어김없이 모래알 같은 추억들이 수북이 쌓였다.


 또한, 그곳은 생을 가꾸는 터전이었다. 진상 손님 때문에 구석에서 울먹이는 점원과 그녀를 대신해 손님의 부름에 다급히 뛰어가는 점장, 주차장 출구에 서서 비바람 맞으며 차량을 인도하는 아르바이트생과 황금색 높다란 출입문을 열어주며 정중히 인사하는 호텔리어, 지하에서 쉴 새 없이 짐을 나르는 택배회사 직원과 높은 층 어딘가에서 집무를 본다던 그룹 오너까지, 우리 모두는 그곳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매진하며 돈을 벌고 인연을 만나 살아가고 있었다.


 한동안 불만이 가득했던 나도 차츰 그곳 생활에 적응해갔다. 대안이 없는 현실 속에선 미운 정도 빨리 드는 법이었다. 로비에서 내려다본 남(南)서울의 풍경은 날마다 색과 멋이 달라, 미세먼지가 가득한 날도 그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방문객들은 정해진 시간에 줄 서야 볼 수 있던 전경을 매일 아무렇지 않게 즐길 수 있었으니, 그것도 내 복이었으리라. 비좁고 탁한 공간이었지만, 절친한 소수의 동료들과 눈치 보지 않고 종일 즐겁게 일 할 수 있음은 이제와 떠올리면 참으로 값진 행운이었다. 진행한 프로젝트가 당장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는 못했으나 우린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었고, 회사는 넉넉한 연말 보너스로 격려했다. 


 무엇보다 기뻤던 일은 남몰래 흠모했던 J와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었다. 그 회사의 팀장급 간부였던 그녀는 가늘면서도 꼬리가 참 고운 눈을 가졌다. 그리도 선한 눈매로 항상 먼저 인사하길 주저 않던 그녀였다. 이사 후 우린 전보다 자주 마주쳤고, 그 때마다 J는 언제나 처음 만난 듯 해맑게 웃어주었다. 대기업 팀장과 협력업체 대리였던 우리 둘의 간격이 아득하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존재 그 자체로 내게 큰 낙이자 기쁨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쯤 비로소 그곳을 내 직장이라 말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바라본 서울의 가을





 그러다 올해 겨울, 그 사단이 벌어졌다. 맥주잔을 부딪치며 새해의 희망을 논한 지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그놈의 바이러스 때문에 L타워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고 만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하고도 서글픈 광경이었다. 변함없이 눈부신 조명 아래 행인들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직원들만 덜렁 남아버린 그 섬뜩한 황량함. 어느 날 갑자기 SF소설에 나올법한 유령도시가 되어버린 그 광활한 공간에는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에는 너나 할 것 없이 그것이 통행의 증표라도 되는 듯 처량한 사원증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L타워는 입지선정을 잘못한 동네 아울렛 쇼핑몰이 아니었다. 온종일 장사를 공쳐도, 매상이 적자로 돌아서도 전등 하나 끄는 것, 매장 하나 닫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잠시라도 문을 닫기에는 L타워는 너무 높았고 거대했으며, 그만큼 수많은 생(生)을 매달고 있었다. 


 바이러스가 겨울 마른 들판 위에 쥐불처럼 끈질기게 살아나기를 반복할 때 쯤, 매출이 90% 감소했다는 사내 메일이 도착했다. 그동안 진행되던 프로젝트들은 과정과 결과에 상관없이 폴더 속 파일 무더기로 전락했고, 함께 일하던 이들도 소속과 직급 구분 없이 해고되기 시작했다. 쌀쌀맞게 굴던 총무과 여직원도, 공짜 점심을 생색내던 S과장도 그렇게 떠났다. 회사의 방만한 경영도, 구성원들의 무능력 때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책임 없는 이들이 생의 터전에서 속절없이 내몰리고 있었다.


 그렇게 을씨년스럽고 뒤숭숭하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J와 마주쳤다. 평소처럼 살갑게 인사를 건넨 그녀는 나를 등지고 문을 바라보며 섰다. 그러다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 잠깐 돌아보며 나와 슬쩍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금 앞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 그만둬요.”

“안돼요!”     

하필 왜 그 말부터 나오고 말았을까. 

뜬금없는 내 외침에 그녀는 피식 웃었고, 나는 뒤늦게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     


"언제-"

“…… 내일이요.”     


떠올려보니 며칠 전, 로비에서 상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의 낯빛이 유독 어둡던 때가 있었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던 그녀였기에 더 잊을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인상 좋고 야무지게 일 잘한다는 평판이 자자하던 그녀만은 예외일 거라 믿었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 역시 코로나라는 파고를 넘지 못한 것이다.


 다음 날 점심 무렵, 그녀의 사무실 앞에 서서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환한 미소를 띠며 달려왔고, 난 방금 산 꽃바구니를 건넸다. 우릴 바라보던 사람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녀에게 건넨 꽃바구니 속 카드에는 오로지 안녕과 평안을 바라는 문구만 적어두었다. 옆자리 동료는 왜 연락처를 주지 않았냐며 나무랬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후 계약 해지 날짜가 발표되었다. 그것은 곧 나의 해고를 뜻했다.   

  





 어느새 직원의 80%가 떠나간 회사에는 종일 통증 같은 적막만이 맴돌았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는 여전히 빛났지만, 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내가 떠날 시간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짐을 쇼핑백에 대충 욱여넣고 남은 이들에게 감사와 축원의 메시지를 전송했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감히 희망을 입에 담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봄이었다. 나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내 비좁고 탁한 공간을 기억해두기 위해, 문을 닫기 전 구석구석을 유심히 관찰하고 새겨두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 몫으로 빛나던 전등을 내 손으로 껐다.


 밖으로 나왔더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고, L타워는 여전히 밤을 밝히고 있었다. 매출이 곤두박질쳐도, 직원들이 떠나도, L타워는 아무렇지 않은 듯 빛나야 했다. 슬픔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어쩌면 ‘랜드 마크’의 서글픈 숙명이었으리라.     


처음부터 시작할 겁니다.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했던 방식으로 들어갈 겁니다.
 낯설고 힘들겠지만 원하는 대로 할 겁니다.
웹툰 <미생>  2수 中 장그래가


2021년 1월 24일 퇴고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또렷해져라. 내 인생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