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살의 어느 날, 갑자기 객식구가 생겼다.
딱 내 나이와 배가 차이 나는 언니.
자기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목표 없이 방황 중이었다.
그 언니에게 우리 집이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아는 사이이긴 했지만, 나와의 특별한 접점은 없었기 때문에 같이 살 생각을 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첫 번째 룸메와의 10개월이 아직 진하게 남아있어서 더 그랬다.
나이가 많으니 첫 룸메보다는 나을 거라는 조금의 기대를 해도 될까?
그리고 중요한 생활비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이미 최대한으로 아껴서 살고 있었지만, 식구가 한 명 늘었으니까 허리띠를 더 바짝 조여야 한다.
며칠을 머리에 쥐가 나도록 이리저리 방법을 모색하며 지냈다.
공항에 마중 가서 만난 언니는 잔뜩 겁에 질린 어린아이 같았다.
기대감보다는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어른도 새로운 장소는 무섭구나!'
작고 두툼한 손을 꼭 잡아주고 안심을 시키며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몇 달간의 새로운 '훈련'이 시작됐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오니 주방에 커다란 마트 봉지 몇 개가 빵빵한 자태를 뽐내며 쌓여있었다.
(높은 가격으로 인해 난 가지 않는) 마트에서 물건을 저렇게 많이 산 건가?
내가 어디서 장 보는지도 알려줬는데?
집안일을 이제 자기에게 맡기라고 하더니 내가 준 생활비를 이렇게 쓴다고? 자기 돈도 아니면서?
내가 없는 돈에서 쪼개느라고 얼마나 머리가 아팠는데...
복잡한 감정으로 뭘 이렇게 많이 샀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모든 게 다 갖춰져야 집안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그리고 중국어를 못하는데 장은 봐야 하니까 마트로 갔다고 당연한 듯 말했다.
우리 집에 기본적인 건 다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거지?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건 또 뭐야?
물건이 눈에 보이고 보디랭귀지로 소통하면 되는데,
판매하는 사람이 계산기로 금액 보여주면, 언니는 돈만 내면 되는데 뭐가 어렵다는 걸까?
말문이 막힌 나를 뒤로하고 언니는 장본 걸 꺼내기 시작했다.
월계수 잎, 통후추, 후추그라인더, 정향, 파프리카 가루 등 웬만한 향신료를 시작으로 일 년에 한두 번 쓸까 한 주방도구들, 집에 있는 것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용품들까지.
그것들을 꺼내면서 너무 즐거워하는 언니를 보며 내 감정은 더 복잡해졌다.
열아홉이 보는 서른여덟은 '어른'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생활비가 넉넉지 않으니, 앞으로 뭘 사야 할 때 미리 말해달라고 했다.
언니는 내 말을 듣자 언짢은 표정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크게 심호흡하고 따라 들어가서 "돈 정말 아껴야 살 수 있어서 어쩔 수가 없어요."라고 달래주고 나왔다.
'저 나이에도 경제관념이 없을 수 있구나. 내가 더 고민해서 잘살아 봐야겠다.'
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언니가 유일하게 당당해지는 일요일.
교회 청년부 모임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동생들이 보내는 존경의 눈빛을 받는 언니.
다른 이에게 조언하는 걸 좋아하는 언니에게는 딱 알맞은 장소.
거기에서 자신감을 채워오는 것 같았다.
언니가 나와 함께 지내는 동안에 편안한 상태로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할 수 있도록
섬기고 베푸는 마음으로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라면/나였으면 ……텐데'라는 생각을 누르며 살아야 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생각도 훨씬 깊어진 계기가 되기도 했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자아 점검도 더 열심히 하게 됐다.
서른여덟도 아직 성장이 한창인 나이라는 것.
어른도 겁이 많다는, 아니, 어른이 될수록 도전을 두려워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고 성장하는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현재의 나는 그런 어른일까? 잘 성장해 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