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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샌달 Oct 05. 2024

막내는 처음이라

예? 제가 귀엽다고요?

'난 늘 의젓하고 듬직해야 해.'

집에서는 맏이, 밖에서는 엄마/언니 같은 친구인 나.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늘 나를 보며 '듬직하다', '의젓하다'라고 했던 말들이 부지불식간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내 모습 그대로를 보고 해준 말이겠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말을 듣던 어린 나에겐 '언제나 그런 모습'이어야만 할 것 같은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래도 되는 때에도 노력하며 지냈으니까.

나는 어딜 가나 첫째 아니면 챙겨주는 역할이었다.


사람의 내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씨앗'이 심겨 있다.

성장 과정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씨앗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내 내면에는 유독 참을성과 책임감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발랄함, 귀여움 등과 같은 것은 내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부모님 외에 다른 이에게 챙김 받는 것도 어색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갑자기 생긴 객식구는 나와는 반대로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사람들 만나는 걸 매우 좋아하는.

하지만 나 없이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그녀로 인해 방과 후 편히 집안에서 쉬는 건 포기해야 했다.


그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일요일.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부서 모임을 하며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은 평소보다 더 공들여 화장하고, 생기 있는 얼굴로 집 밖을 나선다.


우리 교회는 청년부가 2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1부는 27세 이상, 2부는 20세부터 26세까지.

언니는 청년 1부로, 난 당연히 고등부로 가면 되는데, 나도 같이 청년 1부 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고등부 선생님이 갑자기 언니와 오빠가 되었고,

스물일곱 살 언니·오빠들은 갑자기 막내 타이틀을 나에게 빼앗겼다며 귀여운 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난생처음 '막내'가 되었다.


청년부에 온 고등학생이라니!

언니·오빠들이 나를 둘러싸고 계속 귀엽다고 했다.

하트를 박은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저 안 귀여워요. 귀엽다는 소리 처음 들어요."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지 계속 귀엽다는 말만 반복하는 그들에게 다시

"자꾸 귀엽다고 하지 마요. 이것 봐봐요, 여기 닭살 돋았잖아요!" 하면서 팔을 보여주자,

"아악!!! 귀여워!!!!!"라고 소리 지르며 날 쓰다듬고 안아주는 언니들 품 안에서 어리둥절했던 나였다.


청년부 언니·오빠들과의 시간은 나에게 즐거움이었다.

대화가 너무 잘 통하고, 그들의 사는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점점 청년부 모임 가는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객식구 언니와 지내는 몇 달 동안만 다닐 것 같았던 청년부 활동은 언니가 간 이후로도 계속됐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고등부가 아닌 청년부 모임에 참석했다.


직장인보다 학생 비중이 컸는데, 대부분 중의대(中醫大)나 사범대에 다녔다.

가끔 언니·오빠들이 학교 근처에서 모임 한다고 하면 나도 함께했다.

우리 집에서 교회까지 2시간, 교회에서 학교까지 1시간이 걸렸지만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라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정말 재밌게 다녔다.


어쩌다 한 번씩 나를 보며 걱정하는 말투로

"또래랑 어울려야 하는데 노땅들이랑만 놀아서 어떡하니?"

"요즘 애들 유행을 좀 따라가야 할 텐데, 너무 우리 나이대 얘기만 해서 좀 걱정돼."라고 내게 말해도

언니·오빠들이랑 노는 게 훨씬 재밌는 걸 어떡해요? 라며 마냥 해맑았던 나.


난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듣고 있기만 해도 즐거웠다.

연애와 결혼, 진로, 사업, 직장 문제 등 미래를 위한 현실적 고민으로 가득한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을 미리 그려보고 생각해 볼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그리고 각각 다른 생각과 꿈의 충돌을 보면서, 정말 가끔 벌어지는 토론이나 언쟁을 통해 삼사십 대도 아직 여러모로 방황 중인 또 다른 사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돈을 아끼려 한 끼에 천 원 이상 쓰지 않는 나에게

가끔 언니·오빠들이 사주는 떡볶이, 돈가스, 파스타 등도 위로가 되었다.

매번 얻어먹는  미안해하는 나를 보며 언니·오빠들은 막내는 원래 그런 거라고, 나중에 나도 동생들에게 내리사랑을 베풀면 된다고 했다.


1년 정도 청년부 모임에 참석하며 막내로서 실컷 예쁨과 귀여움을 받았고, 안에 꼭꼭 숨어있던 어리고 발랄한 모습들도 꺼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언니/누나의 위치가 되었을 때 그 사랑을 열심히 흘려보내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언니·오빠들이 생각난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사랑이 느껴지는 같아 그리워진다.

참 행복한 막내 생활을 경험해 봤네!


인생은 끊임없이 나를 발견하는 과정인가 보다.

의젓함과 듬직함, 참을성과 책임감만 가득한 줄 알았던 내게

발랄함과 귀여움, 그리고 그걸 수용할 수 있는 마음도 생겼으니.

다른 이를 챙기기만 하던 내가 챙김을 받을 줄도 알게 됐으니까.


매일이 내가 모르는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된다.

짜증과 후회 같은 나쁜 감정들로 그 시간을 방해받기도 하지만,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는 즐거움 하나로도 충분히 인생이 즐겁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엄마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고 하셨다.

나를 한정하는 순간, 아직 한참 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막아버리는 어리석은 벌인 것과 다름없다.

"나는 원래 그래."는 없는 거다.


모든 것에 열심히 도전하고 수용하며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누가 봐도 '악(惡)'이라 여겨지는 것을 제외하곤,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잖아.

삶을 살아가며 자신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생겼기 때문에,

그 기준이 맞는지 늘 의심하고 확인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에 걱정하지 않는다.


내일은 또 나의 어떤 새로움을 발견할까 하는 기대로

오늘 남은 하루를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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