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 감상평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감상했다. 등장한지 오래된 이 작품은 아직까지도 최고의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평가되고, 인터넷에는 수많은 해석들이 아직도 나오고 있다. 이 작품은 비유나 상징이 많아서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나는 이 작품을 우리 사회를 빗대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에반게리온 속 세계에서는 인류보완계획이라는 명분 아래, 아직 정체성도 확립되지 않은 14살 아이들을 에바에 태워 싸우게 만든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도구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에바를 타면서 겪는 아이들의 고통은 인류의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정체성이 형성되기 전인 어린아이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강요하고, 강제로 학원차에 태우는 느낌이 어딘가 낯설지 않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행복보다는 성과를 강조한다. "서울대/의대 못가면 인생 망한다", "대기업 못가면 실패자다"와 같은 프레임으로 아이들을 몰아넣는다. 마치 너가 에바에 타지 않으면 곧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몰아넣는 작중의 누군가들 처럼 말이다.
작품 내에서 답답한 것은 아이들에게는 애초에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가 온다는건 인류전체 생존의 위협이니 말이다. 실제 사회도 마찬가지로 "이거 안하면 굶어죽는다", "경쟁에서 밀려난다"는 공포를 계속 주입함으써 아이들의 선택지를 없앤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두 같은 길을 걷게 된다.
레이는 그저 명령을 수행할 뿐,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마치 기계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대사는 대부분 짧고 단조롭다. 레이는 자기 감정이나 가치 판단을 배제한 채, 시스템이 시키는 일을 수행한다. 이것은 마치 정답 맞추는 훈련을 계속하면서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리는 아이들을 보는 듯 했다. 언젠가 방송에서 학원에 많이 다니는 아이에게 왜 다니냐고 묻자, "엄마가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라고 답한 장면이 떠오른다.
레이는 자신이 왜 에바를 타는지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고, 그게 옳은지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저 해야하는 일이니까 한다. 마치 현대사회에서 왜 공부해야하는지, 왜 일해야하는지 질문할 수 없는 구조와 닮았다. 한국사회에서 "왜?"를 묻는 사람들은 학교 수업을 방해하는, 회사 분위기 흐리는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 실제로 어떤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실험을 했는데, 대학교 수업 중에 질문을 하는 학생에게 다른 학생들이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고등학교는 좋은 대학에 가야한다는 명령만 내리고, 회사는 성과를 내야한다는 명령만 내린다. 결국 사람들은 목적없는 효율성 속에 살아가게 된다. '왜'라는 질문이 사라진 사회를 인간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그나마 레이는 애초에 인조인간이었으니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하지만, 실제 우리 주변 사람들은 실제 인간인데 불구하고 인조인간처럼 길러진다. 레이는 태어날때부터 도구로 만들어졌기에 자아가 없는게 자연스럽고 이상하지 않지만 우리 인간은 자아를 찾아야하는 존재인데, 과연 인간답게 길러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든다.
사춘기는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시기이다. 그렇게 답없은 질문에 대답하려 노력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그 시기를 오롯이 공부에 빼앗긴다. 그러다보니 자신에 대한 질문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채 성인이 되어버린다. 몸은 이미 성인인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전공조차 자신이 선택한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적성이 아닌 점수 맞춰 대학간다는 말은 더이상 낯설지 않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직장에 들어가서도 이게 내가 원한 삶인지에 대한 의문이 폭발할 수 밖에 없다.
작중에서 레이는 복제된 존재다. 레이 1호가 죽으면 2호가 등장하는 식이다. 여기서 끔찍한 것은 레이는 자신이 죽어도 다음 레이가 나오는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회가 표준화된 인간을 계속 복제 생산하는 과정과도 같다. 동일한 교과서, 동일한 평가 기준, 동일한 인생 경로. 결국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닌 서로 다른 번호의 레이만 양산되는 식이다. 비유하자면 현실의 인간을 두고 이 사람은 대학 신입생 1호, 저 사람은 대기업 신입 8호와 같이 사람을 구분하는 식이다.
어떻게 보면 레이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시민상이다. 체제를 의심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주어진 일을 열심히 효율적으로 수행한다.
보통 로봇만화라고 하면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지구를 켜야한다는 사명감에 신나게 로봇에 탑승한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에서의 신지는 처음부터 에바를 타기 싫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에 주위 사람들은 에바에 타지 않으면 인류가 멸망한다며, 네 손에 인류의 운명이 달려있다며 신지를 압박한다. 그럼에도 신지가 에바를 타기 싫다고 말하자, 그렇다면 부상당해 들것에 살려나가는 레이를 태우겠다고 한다. 들것에 누워있는 레이를 보며 결국 신지는 에바에 타기로 하는데, 이는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강요 당한 결과이다. 이것은 마치 한국 사회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너를 위한 거라며 공부를 강요하는 구조와 같다. 겉으로는 선택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선택지 없는 선택일 뿐 이다.
신지는 파일럿으로서 재능이 없다고 말하지만, 위기 상황이 오면 놀라운 조종 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신지를 칭찬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공부 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공부시켜, 성적이 오르면 주변 어른들은 "거봐라, 하면 되잖아"라고 칭찬하는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렇게 아이들은 한국 사회 시스템에 스며든다.
신지는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는 파일럿을 여러번 그만두는데, 그때마다 방황한다. 그러나 기껏 도망쳤다해도 할 수 있는건 그저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다. 갈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다. 파일럿 말고는 해본게 없으니 말이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정답 맞추는 법만 가르쳐주고 질문을 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 막상 아이들이 공부외에 다른걸 해보려고해도, 그걸 탐색하는 방법 자체를 배운적이 없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고3 학생들은 대학만 가면 하고 싶은거 다할거라고 말하지만, 막상 대학에 입학하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다. 지금 모르는데 대학가면 갑자기 알게 될리가 없다. 오히려 대학가면 더 바빠진다. 하고 싶은거 한다는 마음은 또다시 뒤로 미뤄지고, 일단 학점을 따고, 일단 취업을 하자는 생각으로 스펙 쌓고, 공모전, 인턴하다보면 압박감이 더 심해진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는 방황을 허락하지 않는다. 신지가 파일럿을 그만두고 탈주했을 때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다름아닌 시간아니었을까.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을 찾을 기회 말이다. 하지만 시스템은 방황할 시간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사도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비슷하다.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하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가 끝나면 곧바로 취업 준비라는 사도가 찾아온다. 방황을 허락하지 않으니 아이들은 스스로를 찾을 기회는 없고, 결국 시스템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작중에서 신지에게 에바 안타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마치 우리 주변에서 힘들면 학교 그만두라거나, 회사 그만두라는 사람이 없는 것 처럼 말이다.
파일럿을 그만둔 신지가 다시 돌아가는 장면에서 "저는 에반게리온 초호기의 파일럿 이카리 신지입니다!"라고 힘차게 외치는 장면이 등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두고 드디어 신지가 각오를 다지고 성장했다며, 신지의 각성 순간으로 해석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에 종속되는 것 처럼 느껴졌다. 신지는 자신을 소개할 때 에바 파일럿이라는 타이틀을 이름 앞에 붙힌다. 직업이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홍길동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대 출신 홍길동입니다", "삼성 출신 홍길동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것과 같다. 타이틀이 자아를 대체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지가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은 각성이 아닌 시스템과의 동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신지는 파일럿과 적성에 맞지 않는다. 신지는 내성적이고, 싸우는 것도 싫어하며,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며, 책임지는거 부담스러워한다. 그런데 에바 파일럿에게 요구되는 적성은 공격성, 결단력, 책임감, 리더십이다. 이는 신지의 성향과 완전히 안맞는다. 적성이 다른데도 에바에 타서 괴물과 싸우는 것이다. 작중에서 신지는 첼로 연주를 좋아하는데, 이는 완전히 무시된다. "그거해서 먹고 살수 있어?"라는 말만 돌아올 뿐. 우리 사회도 비슷하다. 지금 좋아하는게 있어도 그건 취미로하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말한다.
카오루는 신지를 에바 파일럿으로서가 아니라 이카리 신지 그 자체로 대해준 유일한 인물이다. 카오루를 만나기 전까지 신지는 아버지, 미사토, 레이, 아스카에게 모두 파일럿으로서의 가치만 평가 받았다. 그러면에서 "내가 태어난 이유는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어"라고 말해주는 카오루에게 신지는 어쩌면 처음으로 파일럿이 아닌 인간으로서 인정받은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오루는 결국 사도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즉, 신지와 카오루의 만남은 애초에 금지된 관계였던 것이다. 카오루는 사도였기 때문에 시스템 밖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지가 카오루를 자기 손으로 죽인 장면은 단순히 친구를 죽인게 아니라 시스템이 신지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성을 체제 유지의 논리에 종속시킨 순간이다.
에반게리온이라는 시스템은 시스템 밖의 관계를 철저히 차단하는 세계이다. 신지와 카오루의 관계를 파악하자, 시스템은 즉각 카오루를 사도라고 낙인찍고 제거를 명령한다. 시스템 입장에서는 시스템 밖의 모든 존재를 적이라고 규정한다. 현실에서도 대학교 전공 이외의 과목들은 학생의 적이고, 취미는 시간낭비이다. 게임하면 인생 망한다고 말하며 게임을 사도로 규정한다. 음악하면 먹고 살 길이 없으니 음악 역시 사도다. 여행은 시간낭비니 그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말한다. 결국 신지는 사도를 죽이라는 시스템의 명령을 수행하고, 그 결과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자신의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였던 카오루의 얼굴을 보면서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다. 이 얼마나 잔인한가. 시스템은 신지에게 사도를 자기손으로 죽이라고 강요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직접 죽여야 트라우마가 남고, 그래야 다시는 시스템 밖으로 나갈 생각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점점 하나의 '기능'으로서의 역할만 하게 될 뿐이다.
카오루를 죽인 신지는 완전히 망가진다. 무기력해지고, 자기혐오감이 극대화 된다. 자신이 카오루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극장판에서는 그의 식물인간 상태와 다를 바 없다. 시스템 밖을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걸 억지로 포기하면 정신이 무너진다. "난 원래 음악하고 싶었는데...", "난 원래 여행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난 원래 요리사가 되고 싶었는데..."라고 말하면서 우울증,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극장판에서의 신지는 살아있지만 죽은것과 거의 다름없는 상태이다. 우리 사회에도 보면 자신 안에 있는 카오루를 죽이고 에바를 계속 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 내 인생으로치면 리눅스와의 첫 만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당시 나에게 있어 에바 초호기는 통계학이고, 나는 통계학을 다루는 파일럿에 해당되었을 것이다. 내가 통계학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하는지에 대한 평가는 논문 수나 학위인데 이는 싱크로율에 해당한다. 사실 통계학 입장에서 시스템 밖에 있는 리눅스 시스템은 사도에 해당한다. 리눅스는 통계학과 상관없는 외부 세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원에 다닐 당시 카오루를 죽인 신지처럼 그 자유로운 가능성을 끊고 다시 체제 안으로 들어갔었다. 이건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 부정이기도 했던 순간이었다. 물론 이후에 학교라는 시스템 자체를 탈주하면서 나의 길을 걸었지만, 만약 내가 그때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평생 통계학 파일럿으로 살았다면 정말 비극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난 통계학자라고 스스로를 완전히 세뇌시키고, 평생 통계학 논문만 쓰면서 살았다면 이것은 신지의 삶과 다를바 없다.
에반게리온에는 인류보완계획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이는 모든 인간을 LCL 용액에 녹여냄으로써 인간의 고통을 없애겠다는 계획인데, 결국 인간 개개인의 개성을 없애는 결과를 낳는 것처럼, 현대사회에서 정신과 치료를 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을 다시 시스템 속으로 넣어 잘 돌아가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LCL로 인간을 녹여버린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개인의 욕망, 고통, 이상이 모두 녹아 하나의 평균화된 존재가 된다. 너와 나의 경계는 사라지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개인은 사라진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차이가 없으니 갈등이 사라진다. 다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평화. 이는 이레귤러, 예측불가능한 존재를 제거하려는 의도다. 시스템은 예측 가능성을 원하고, 예측 불가능은 위험이라 규정한다. 현실에서 표준화된 교육, 노동 시장의 획일적 요구, MBTI 기반의 사람 분류 모두 개인을 예측 가능한 집단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교육에서는 같은 교과서, 같은 평가 기준을 사용하고, 사회에서는 내집마련과 같은 목표, 안정이나 성공과 같은 같은 가치관, 출생-교육-취업-결혼-육아-은퇴-사망으로 이어지는 같은 삶과 같이 같은 인생을 양산한다. 사실 인간의 예측 불가능성이야말로 창조성과 자유의 근원인데, 그걸 제거하려할때 남는건 안전이 아니라 공허함 아닐까. 시스템 안에 남아있으면 생존은 가능하지만,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의미는 사라지고, 시스템 밖으로 나가면 불안과 생계의 위협이 찾아온다.
극 중에서 신지는 괴로워하며 에바에 타기 싫다고 비명을 지른다. 이는 사회인들이 회사가기 싫다고, 공부하기 싫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다음날 다시 학교로 회사로 출근한다. 왜냐하면 들어주는 사람조차 그 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신지의 정신처럼 조용히 분열된다. 현대에 우울증, 번아웃, 공황장애가 폭증하고 있는 것도 결국 사회전체가 신지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정신과 치료를 받더라도 내일 다시 회사로 출근해서 파일럿으로 살아야하는 것이다. 신지가 아마 정신과가서 에바 타는게 스트레스라고 털어놓아도 의사는 아마 약먹고 휴식 취하고 취미생활하라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아마 에바타는거 그만두라고 말하진 않았을것 같다.
사실 가장 문제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다. 회사 때문에 우울증이 생기는 것은 스트레스 관리를 못해서이며, 번아웃이 오는것은 시간관리를 못했기 때문이며 경쟁 때문에 불안하다면 그건 자기 개발을 안했기 때문이라고 치부한다. 구조적 문제를 개인 정신력 문제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에반게리온만 봐도 14살짜리 아이를 거대 로봇에 태워 괴물이랑 싸우게 만드는게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작중에는 신지의 의료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긴한데, 잘보면 정말로 신지를 치유해지는 사람은 없다. 리츠코는 신지의 상태를 모니터링 하는것 처럼 보이지만 그저 싱크로율을 보고 있을 뿐이다. 미사토는 보호자 역할로 등장하면서 가끔 위로도 해주지만 결국 위로의 목적은 신지를 에바에 태우는 것이다. 실제 아버지인 겐도는 신지를 그저 도구로만 볼 뿐이다. 작중에서 신지의 정신 건강에 진심으로 관심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 사회에서도 누군가에게 상담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그래도 해야한다는 답이 돌아올 뿐이고, 부모조차 그래도 회사는 다녀야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결국 신지에게 필요한 것은 약이나 휴식이 아니라 에바에서 내리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지에게 용기나는 약을 줘서 에바를 기분좋게 타게 만들면 그게 어디 치료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스카는 어떻게 보면 이 작품에서 가장 비극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아스카는 시스템이 원하는 모범생이다. 자발적이고, 경쟁심도 강하고, 성과를 달성하려 노력하며, 외부 인정에 집착한다. 에바 타기 싫다는 신지를 닥달해야 하는것과 비교하면 아주 좋다. 자연스럽게 그녀 스스로 에바에 타는게 영광이라 생각하고, 훌륭한 에바 파일럿으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중요한점은 아스카는 강요받은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깊은 착각에 빠진다. 이건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는 순간 고통은 시스템이 아닌 자신의 탓이 되기 대문이다. 현대 사회는 강요보다 자발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개인을 지배한다. "열심히 하면 보상받는다",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 이런 말들은 아스카가 스스로 자신을 채찍질하게 만드는 장치다. 우리 사회도 아스카 같은 학생을 원한다. 자발적으로 노력해서 1등하고 싶고, 서울대 가고 싶어하는 부모 입장에서나 학교 입장에서도 완벽한 학생들 말이다.
아스카는 인생의 가치를 파일럿 실력으로 증명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현실에서 공부를 잘해야, 대학을 잘가야, 직장을 잘 들어가야 비로소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로 인해 아스카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신지를 시기 질투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동료로 보는 듯하다가 나중에는 경쟁자로, 후반에는 자신을 위협하는 적으로 인식한다. 마치 현대사회에서 타인의 성공이 곧 나의 실패로 인식되는 구조와 같다. 이는 시스템이 관계를 협력이 아닌 비교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아스카는 타인과의 관계가 아닌 타인과의 위치로 자신을 정의한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외롭고 불안하다. 1등을 해도 잠시 뿐, 언젠가 누군가 자신을 추월할 수 있다는 공포 속에 살아간다. 그래서 항상 싸우고 항상 지쳐있다. 애초에 아스카가 외부 인정을 바라고 에바를 타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이 아닌 남들이 인정해주니까 하는 것은 내부 동기가 아니라 외부 동기다. 처음에는 남들에게 인정받아 하는게 좋아보일수 있어도 결국 인정이 없으면 무너지게 되어 있으므로 일종의 인정 중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아스카는 정신적으로 붕괴하고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에바에 타지 못한다. 즉, 시스템이 원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 아스카는 자신을 에바 파일럿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에바를 못타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가치없는 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중에서 싱크로율이 떨어지고 에바에 타지 못하는 순간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1등이 아니면 의미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학이 SKY가 아니면 어디가서 대학이름 말하기도 부끄럽고 대기업이 아니면 불안하다. 목표를 달성해도 문제다. 사회에서 공부에 모든 걸 걸었던 아이가 번아웃에 빠져버리거나 좋은 대학에 갔는데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그건 성취로 채워진 인생이지 의미로 채워진 인생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하다.인간의 정신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구조이다. 아스카의 부상은 신체적 붕괴처럼 보이지만 잘보면 정신적 붕괴가 신체적 붕괴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에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몸이 아파 입원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에반게리온의 가장 무서운 점은 시스템이 허락한 선택지만 보여주고, 그 밖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든다는 점이다. 작중 중심이 되는 인물은 신지, 레이, 아스카다. 셋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스스템 속에 존재한다. 이들에게는 서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시스템 내부에 갇혀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관객 입장에서는 셋 중 하나에 자신을 투영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스템 밖의 삶은 아예 화면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지처럼 힘들어할것인가? 아니면 레이처럼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아스카처럼 열심히 할것인가? 네번째 선택지인 "에바를 타지 않는다"는 선택지로 제시되지 않는다. 이는 사회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도 비슷하다. A라는 회사와 B라는 회사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중에는 에바에 타지 않고도 행복한 14살은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객이 상상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작중 신지 친구로 등장하는 켄스케를 보면 에바를 타지 않고도 취미인 사진 찍기를 하면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작품은 켄스케를 에바에 타고 싶어하게끔 그리며 신지를 부러워하며 자신도 파일럿이 되고 싶다고 그린다.
작중에서 시스템 밖은 위험하다. 온통 괴물이다. 사도와 카오루. 하지만 그들은 애초에 이해불가능하거나 위함한 존재로 그려진다. 사도는 인간을 공격하는 괴물로 묘사되고 카오루는 인간을 배신한 사도처럼 그려진다. 결국 관객은 본능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끼게 되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메시지가 잠재적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있게 시스템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될까. 문제는 밖으로 나가도 살 수 있는 인프라가 없다는 것이다. 시스템은 탈출 가능하지만 생존 불가능한 세계를 만들어놨다. 다른 나라들은 여러가지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적 인프라가 잘 갖춰져있는 반면, 한국은 모든 자원이 대기업, 전문직, 학계, 공무원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 중소기업은 불안정하고, 자영업은 힘들고, 예술가는 돈벌이가 안되고, 프리랜서는 위험하다. 시스템을 벗어나면 바로 생계의 위험이 찾아온다. 당장 돈을 어떻게 벌고, 뭐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사회가 이레귤러를 없애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다. 미디어는 대기업 안다니고 만족하는 사람은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비정규직이나 백수생활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여준다.